권익 보호 사각지대 빠진 병역특례자들, “우리는 군인도 근로자도 아닌 신분”

병역특례자 신분 악용한 부조리 만연해 정부도 노력했지만, “TO 확대 등 구조적 개선 필요” 1차적 책임은 기업에 있지만, “결국 정부도 면책 못 피할 것”

pabii research

지난 2018년 3월 페르시아만을 항해 중이던 화학물질 운반선에서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병역을 치르던 스물다섯 살의 한 청년 A씨가 사망했다. 선내 괴롭힘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이에 유족들은 2019년 3월 가해자와 회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은 A씨의 사망에 가해자와 회사 등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승선근무예비역 등 병역특례자가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상황을 악용해 괴롭힘 등 부조리 행위를 이어가는 악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승선근무예비역의 경우 선박이라는 고립된 공간 속에서 권익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 더욱 그 지위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승선근무예비역이란?

우리나라는 징병제 국가인 만큼 모든 성인 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병역의무자들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건 아니다. 이와 같은 현역복무 외 병역의무 이행 제도 중 하나로 ‘산업지원인력제도’가 있는데, 여기에 승선근무예비역이 포함된다. 산업지원인력제도란 군 필요 인원 충원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병역 자원의 일부를 병역지정 업체 또는 해운·수산업체 등에 승선 인력 등으로 지원토록 하는 제도다.

승선근무예비역은 그중에서도 특히 항해사나 기관사 자격을 가진 병역의무자가 병무청이 배정한 해운업·수산업 분야의 업체에서 근로계약에 의한 근로자 신분으로 일정 기간 승선 근무하며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제도다. 승선근무예비역을 통해 우리나라는 승선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으며, 승선근무예비역은 우리나라 해양산업 발전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정부 노력에도 사라지지 않는 사각지대

그러나 승선근무예비역은 병역의무 이행 중이라는 신분상 제약으로 인해 사측, 혹은 상사들의 괴롭힘 등 부당한 처우에 적절한 대응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승선근무예비역이 병역 의무자임과 동시에 해운업체의 근로자라는 이중적 신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해상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의 권익 보호엔 언제나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이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정부는 우선 승선근무예비역이 자신의 권익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이를 그대로 감수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승선 전 근로 권익 보호 및 피해구제 신고 요령 등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또 복무 중인 승선근무예비역에 대해선 연 2회 모바일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권익 침해 사건 발생 시 피해구제 및 정기적인 상담 등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승선근무예비역의 복무 실태가 부당한 처우 등에 대한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승선근무예비역의 본인 희망에 의한 편입 취소가 증가하고 있음은 승선근무예비역의 근로환경이 매우 열악함을 방증한다. 병무청이 제공한 ‘2018~2022년 편입 취소 현황’에 따르면, 편입 취소 사유 중 본인 희망에 의한 취소가 3년 새 급격하게 증가했다. 2020년 54명에 불과했던 본인 희망 편입취소자는 2021년 166명, 2022년 195명으로 3년간 약 6배가량 증가했다.

승선근무예비역, 구조 자체에 문제 있어

결국 문제는 승선근무예비역 병역특례 구조 자체에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해운업체별 승선근무예비역 인원 배정 구조는 정부가 차년도에 필요한 승선근무예비역 일자리를 업체별 1:1로 할당하는 식이다. 즉 승선근무예비역의 노동시장에서의 위치가 자연히 ‘을’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을의 입장에 서 있는 승선근무예비역은 복무기간 동안 생기는 크고 작은 트러블을 그저 감수해야만 한다. 반면 고용업체의 입장에서 승선근무예비역은 어차피 회사로 ‘와야 할’ 인력이다. 자연히 승선근무예비역에 대한 처우나 근로 환경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선 승선근무예비역의 TO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TO가 확대된다면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배정될 청년들이 처음부터 보다 좋은 조건의 해운업체를 대상으로 구직활동을 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업계 내 근로조건 개선 경쟁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승선근무예비역의 해운업체 간 이동 제한을 완화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동 제한이 완화된다면 좋은 조건의 해운업체로 인력이 넘어갈 가능성이 높으니 이 또한 선한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 현재는 업체 측에서 경영상의 이유 등으로 업무를 제공하지 못하거나 위법·부당한 행위 판정이 확정되는 경우 외엔 자의적인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병역특례 자체도 문제, 부당한 대우 너무 많다”

승선근무예비역 외 병역특례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다. 병역 특례로 입사한 회사 측으로부터 부당 대우를 받는다 해도 이를 합법적으로 막을 길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초 병역특례란 군 인력 자원 중 일정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 국가 기간산업체나 특수 연구기관, 방위산업체에 투입하는 제도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병역특례 제도가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가로막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단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승선근무예비역과 같이 ‘군인도 아니고 근로자도 아닌’ 신분이 발목을 잡고 만다는 것이다.

의무기간을 무조건 채워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특례 업체를 쉽게 옮길 수 없다는 약점을 이용해 임금 체불과 인격적 모독 등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기업체에 채용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병역특례요원들의 입장도 고려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병역특례 근로자가 해고당한 이후 해고의 효력을 다투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다. B씨는 병역특례 노동자로 근무 중 노조 활동과 관계돼 병역특례 기간 5년 중 6개월이 모자라는 4년 6개월간 근무하다 해고당했다. 이에 군대에 징집되었으나, B씨는 해고특례근로자들과 함께 병역특례제도의 부당성에 항거하며 농성을 해 수배를 받아왔다. 그러나 결국 B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승선근무예비역 등 병역특례자들의 인권 침해 방지의 일차적 책임은 기업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역특례자들 역시 일반 군 장병처럼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정부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저출산 고령화를 외치며 아이를 낳으라 종용하면서도 정작 스러져 가는 청년들은 못 본 체하는 사회, 청년들을 노예로 부려먹다 ‘고장’ 나면 나 몰라라 하는 사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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