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정부 R&D ‘옥석 가리기’ 시작, 성과 보기 힘든 ‘장기 프로젝트’는 어쩌나

尹 정부, 내년도 R&D 예산 13.9% 삭감 증액 일변도 달리던 R&D 예산, “‘진짜’ R&D 찾을 것” 단기적 성과 내기 힘든 장기 프로젝트, “‘정량적 평가’ 유연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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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R&D 제도 혁신 방인/출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윤석열 정부가 내년도 국가 주요 R&D 에산을 21조5,000억원으로 책정했다. 올해 예산 24조9,500억원 대비 약 13.9%(3조4,000억원) 줄어든 수치다. 정부는 예타 조사 기준을 완화해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대응하고 R&D 사업평가에 상대평가를 도입해 하위 20% 사업은 구조조정할 방침이다. R&D를 R&D답게 혁신하겠단 취지인데, 일각에선 단기적인 성과가 나오기 힘든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정량적인 평가만으로 가려져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과기정통부 “R&D 효율화할 것, 7대 핵심분야 투자 늘리겠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 브리핑을 열고 “그동안 누적된 비효율을 과감히 걷어내 R&D를 효율화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나눠먹기·성과부진 R&D 사업 108개를 통·폐합해 전체 예산은 줄이는 대신 AI·우주·바이오·양자기술 등 7대 핵심분야 투자를 늘리겠단 계획이다.

과기정통부는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실력 있는 연구자와 국제 협력 R&D 등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우선 국가 R&D 제도를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R&D 사업평가에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하위 20% 사업은 구조조정하거나 차년도 예산을 삭감하겠단 계획이다. 내년도 R&D 예산이 14%가량 삭감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과기정통부는 기업 보조금 성격의 나눠주기식 사업, 성과부진 사업, 단기 현안대응 사업 108개를 통·폐합해 내년도 예산 3조4,000억원을 삭감했다.

다만 국정철학에 부합하는 주요 R&D 사업 예산은 오히려 늘었다. 대표적으로 12대 국가전략기술은 올해 예산(4.7조원)보다 6.3%(5조원) 증가했다. 이 중 △첨단바이오(16.1%↑) △AI(4.5%↑) △사이버보안(14.5%↑) △양자기술(20.1%↑) △반도체(5.5%↑) △이차전지(19.7%↑) △우주(11.5%↑) 등 7대 핵심분야 투자가 증가했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을 지향하는 △글로벌 R&D와 인재양성 △미래전략기술 △첨단주력산업 △디지털경제 등 분야에는 10조원을 투자한다. 우선 2조8,000억원을 들여 글로벌 협력 R&D와 인재 양성에 힘쓰고, 2조5,000억원을 투입해 우주·차세대 원자력 등 미래전략기술을 개발한다. 이외 △반도체·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모빌리티 등 초격차 기술 확보 △AI반도체, 전고체배터리 등 차세대 원천 기술 확보 △6G 이동통신 경쟁력 향상 등도 함께 노린다.

尹 정부 “R&D를 R&D 답게”

R&D 사업 옥석 가리기는 지난 15일부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다수의 중소기업이 매년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도 제대로 된 R&D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 인식 아래 나눠먹기 관행을 근절하고 ‘진짜 R&D’에 집중 지원하겠단 방침을 세웠다. 그간 우리나라 R&D 예산은 매년 디폴트로 증액돼 왔다. 2013년 16조9,000억원이었던 R&D 예산은 매년 꾸준히 증가해 2019년 20조원대(20조5,000억원)를, 지난해 30조원대(31조1,000억원)를 돌파했다. 특히 전임 정부 시절 R&D 예산이 급격히 증가했다. 2018년 1.1%였던 R&D 예산 증가율은 2019년 4.4%로 높아지고 2020년 18%로 급등했다.

전임 정부 시절 중소기업 R&D 예산 역시 크게 증가해 지난해 약 1조8,000억원이 투입됐으나, 다수 중소기업이 역량 부족으로 예산만 받아 먹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문제 인식이 커졌다. 실제로 박성종 국민의힘 의원이 발표한 ‘R&D 부적정 수행 대표 사례’를 보면 약 40여 개 정부기관이 R&D 과제를 부적정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부처의 도시건축연구사업의 경우 소규모 건축물의 소비에너지 최적화기술 개발과제에 A협회가 과제기획을 수행한 이후 주관연구기관까지 맡았다. 일반적으로 기획 후 공모 과정을 거쳐 주관연구기관을 선정하는데, A협회는 기획 후 주관연구기관까지 꿰차 절차적 하자를 의심받고 있다. B부처의 산업핵심기술개발사업(R&D)의 경우 2017년 산업용 재이용수생산을 위한 저에너지 개발 신규과제 기획 실무작업반에 참여한 연구진이 실제 사업 수행 공동연구기관으로 참여했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2015~2019년 5년 동안 R&D 정책자금을 15회 이상 중복지원받은 기업은 총 106개사에 달했다. 지원액은 총 4,291억8,200억원으로 기업당 지원액은 2억2,490억원, 지원 건당 지원액 1,250억원이었다. 11~14회 중복지원 받은 경우도 335건으로 총 7,792억3,100만원이 지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기업당 지원액이 1억8,610만원, 지원 건당 지원액은 1,490만원이다. 특정 기업이 동일한 연도에 유사한 내용으로 11개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적발되기도 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진=김영사

“R&D 예산 삭감, 단기 사업에만 매몰될 우려 있어”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며 R&D 옥석 가리기의 시작을 알렸다. 다만 일각에선 이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도 나온다. 정부 차원의 R&D 정책이 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예산 깎아 먹기만 반복할 경우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한 사업이 모두 잘려 나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대한변리사회에 따르면 2021년 19개 출연연이 특허청에 등록한 384건의 특허 중 가장 우수한 1등급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오히려 5-6등급이 57.8%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출연연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국내 대학의 기술이전 총수입은 2018년 기준 870억원이었는데 이는 2016년 기준 미국 프린스턴대학 한 곳의 기술이전 수입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과학기술 분야 지표’(MSTI)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정부 연구개발 비중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0.93%로 미국(0.65%), 유럽(0.59%), 일본(0.48%)보다 월등히 높다. 그런데도 실질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는 건,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기업가나 연구자들이 ‘기술을 위한 기술 개발’에 내몰리기 때문이다. 시장성 없는 세계 최초 기술이 담긴 특허는 장롱특허로 전락하지만, 이는 특허 수라는 정량적 평가지표를 충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구 환경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대학교 교수들 또한 더 나은 연구 환경을 찾아 줄줄이 학교를 떠나는 추세다. ‘개미 박사’로 유명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또한 그중 한 명이다. 지난해 이화여대로부터 석좌교수·대학원 에코과학부 신설·영장류연구소 부지 제공 등 파격적 지원을 약속받고 서울대를 떠난 최 교수의 연구실 벽 한 칸엔 한국가학기술한림으로부터 받은 정회원 심사 탈락 통지서가 붙어 있다. 논문 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와 관련해 최 교수는 “이제는 우리 사회가 과학자에 대한 평가 잣대를 유연화해야 한다”며 “네이처나 사이언스 논문 수가 아니라 해당 학문 분야에서 실제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조차 논문 수 등 정량적인 평가지표 아래 평가절하되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R&D 옥석 가리기도 분명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테지만, 그와 더불어 평가지표 재정비도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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