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렉시트’가 안 되는 이유? 당신들이 전문성이 없으니까 그렇지

pabii research

몇 달 전의 일이다.

지가가 엄청나게 역량이 뛰어나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기자 한 명에게 우리회사의 빅데이터 시스템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원하는 방향의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키워드 네트워크를 뽑아줬다.

아, 근거 넣어서 까는 기사 쓰니까 이렇게 속이 시원하네!

자기가 E여대에서 석사 한 기자라고 목에 한껏 힘을 주는게 매우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한 인재를 어떻게 뽑냐는 생각으로 데리고 있었는데,

저 혼잣말을 듣고 한국 언론사의 수준을 알게 된 것 같아서 한동안 허탈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국내 무슨 대학에서 학위를 뭘 받았으니 자기가 잘났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내 눈에 씨알(?)이 먹히는 소리가 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거꾸로 그 학위 쪼가리를 인정해주는거에 고마워해야지.

굳이 따지자면 무슨무슨 연구를 했으니까 자기가 얼마나 뛰어나다고 그러면 (ex. 초전도체 연구) 나도 고개를 숙이겠지.

 

학벌 자랑(?)은 그렇다치고, 저렇게 속이 시원해했던 건 ‘근거 넣어서 까는 기사’를 그간 한 번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 기자 경력이 내일 모레 10년인데 그럼 여태 기사를 어떻게 쓴 거야?

‘근거 넣어서 까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

‘근거 넣어서 까는’이라는 표현 때문에 생각나는 옛날 일 하나를 살짝만 풀어내보자.

첫 직장에 막 들어갔던 2008년, 친구들은 ‘교포X’, ‘특례X’, ‘아버지 빽X’ 이라는 조건이 모두 안 갖춰진 ‘토종 된장’이 i-뱅킹을 뚫고 들어갔다고

부러움 (and 엄청난 질시)이 담긴 시선을 보내주던 그 무렵의 일이다.

H모 그룹이 당시 6조~7조원의 매각 가액으로 팔릴 것으로 예상되던 모 중화학 공업 기업 인수를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바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사님이 내일까지 H모 그룹의 자금 사정, 추가 상장으로 자금 마련할려고 했을 때 시장에 충격파, 외부에 팔 수 있는 자산 등등을 낱낱이 조사해오라고 오더를 내리고는 클라이언트 접대를 나가셨다.

이걸 하룻밤 만에 다 찾으라는게 미친(?) 오더지만, 난 모든 스펙이 X임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 그 직장을 들어갔던 ‘토종 된장’이니까 안 짤리려면 목숨걸고 이걸 다 찾아야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계열사들 간의 지분 구조를 그려놓고, 돈 버는 자회사와 그 돈이 흘러들어가야 유지되는 자회사, 지방의 공장, 부동산 가격 등등의 정보를 모으던 중에

어느 지방 터미널에 대한 채권이 X0년 만기 초장기 채권인데 정부가 약속했던 돈을 안 줘서 파산했던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나서,

자금 흐름을 뒤지다가 아무리 봐도 최소한 1천억원 상당의 비자금이 숨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었다.

 

다음날 이사님께 보고를 드리다가 마지막에 ‘사실 이게 비자금인 것 같다’라고 슬쩍 언급했었는데,

그 날 저녁에 H모 그룹 XX팀 실장님과 술자리에서 ‘비자금’과 XX 터미널 이야기가 나오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란다.

일이 많아 퇴근을 못 하던 시절이었는데, 어쩌다가 10시에 술 자리에 소환되어서 나가보니

그 실장님이 비자금 이야기가 어디 흘러나가면 난 회사 길게 다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발 붙이고 살기 어려울꺼라고 겁을 주셨다.

딱히 어디 이야기 해 봐야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 거라는 생각에 별로 깊게 생각하질 않았고,

그 사건 이후로 이사님이 내가 올린 보고서에 오타가 몇 개 있어도 책을 집어던지며 ‘이 XX XX야’ 같은 표현은 안 써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신입 사원… (뭐 6개월?)이 하룻밤 만에 대기업 비자금을 찾았다는게 좀 허황된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런식으로 Hard material을 찾아내야 이사님한테 책으로 안 두드려맞고, 대기업 실장님께 위협도 듣는거 아닌가?

이런게 ‘전문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역량을 갖춰야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서 먹고 살 수 있는거 아님?

 

잘 정리하는게 기자의 일이죠

다른 기자 하나를 뽑았는데, 전공이나 전 언론사 경력이나 여러모로 기사 못 쓸 사람이 아닌데 너무 기사를 못 쓰길래 물어봤더니

‘잘 정리하는 게 기자의 일’이지 내가 원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사건을 정리하는건 탐정이 할 일이란다.

 

‘근거 넣어서 까는’ 일도 해본 적이 없고, 논리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안 해 봤고,

평소에 하는 일은 ‘잘 정리하는 거’다?

 

요즘 왜 기자들이 ‘기렉시트(기자 + 브렉시트)’한다고들 아우성 치는지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이다.

 

좀 더 논리적(?)으로 짚어보면,

유튜브, 아니 최소한 TV 정도되는 매체가 나오기 전에 대중에게 정보 전달의 매체는 ‘신문’이었다.

라디오, TV도 전달은 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 같은 대신, 얕은 정보를 빠르게 소비시키는 방식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진짜 ‘제대로 된’ 깊은 분석이 들어간 정보는 신문, 그것도 주간지, 월간지 같은 곳들에서 제공됐었다.

 

그런데, 요즘은 유튜브가 그런 정보들, 특히 일반인들이 빠르게 소비하는 주제인 정치, 연예 쪽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전달한다.

당연히 문자 해독력으로 주름 잡는 사람들의 리그인 신문사와 그 신문 구독자들의 자리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정보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민주화(Democratization)’ 작업이 지난 10년? 넓게 잡아 20년 정도에 걸쳐 진행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민주화’ 작업이 Data Science 리그에서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코드 몇 줄만 복붙할 수 있으면 전문가라고 우기는 걸 전문가들이 무시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춰져 있는 반면,

정치, 연예 관련 주제에서는 딱히 ‘전문성’이라는 것이 크게 드러날 공간이 없다.

예를 들어 특정 신물질이 ‘초전도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련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특정 레벨 이상의 훈련이 필수적일텐데,

이걸 허접한 유튜버 주제에 자기가 잘 안 다고 까불거렸다가는 아무리 무지몽매한 대중이라도 맹목적으로 선동되지는 않을 것이다.

Bitcoin 같은 것들이 그런 선동형 바이럴 마케팅으로 끝까지 가치를 유지하는 주제들이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금융권 관련 고급 지식, 글로벌 기술력 시장 등등에서 ‘아는 체하는 유튜버’가 설 자리는 크게 없다.

 

정리하면, 대중이 열광하는 정치, 연예 같은 주제가 ‘신문 부수’를 만들어주는 주제일텐데,

그런 주제에서 문자 독해력이 설 자리가 사라진 탓에 ‘기자’의 역할이 유튜버들의 역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시장이 된 것이다.

정치 기자들이 기렉시트하고는 유튜브 계정을 파거나 정파적으로 한 쪽에 치우친 발언 영상으로 광고비를 직접 버는 시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있다.

 

반면, 진짜로 ‘전문성’이라는 것을 가진 분야에서는 그 전문성이 대중의 열광을 끌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과 지식인 간의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굳이 대중에게 ‘장사’를 하려면 ‘적당한 권위’로 그럴싸해보이는 정보를 나열하는 식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진짜로 전문가라고 생각하는걸까? @.@

당신의 일은 기자가 아니라 정보거래상인

기자 하고 싶다는 분들이 여전히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 기자는

  • 글을 쓰는 사람
  •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

이 아니라, ‘중간 거래상’ 같은 사람이다.

단지 팔리는 상품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품, 서비스가 아니라 ‘정보’인 점이 다를 뿐.

 

근데, 그 정보가 남들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어야 가격을 높게 받을 수 있을텐데,

내가 전문 영역이 몇 가지 없다보니 시야가 좁은데, 아래의 주제들이 그런 ‘남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정보’에 해당되는 주제가 될 것 같아 보인다.

  • 모 그룹 비자금을 밝혀내는 재무·회계 지식
  • 주가 조작을 추적할 수 있는 금융 지식
  • 금융당국의 경제 정책을 추적하는 경제 지식
  • AI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코드 복붙인 것을 찾아내는 Data Science 지식

 

기업의 비자금이 언론 보도로 나가고 결국 검사들이 압수수색을 들어오게 되는 사건이나,

정치권의 부름을 받은 임명직 공무원들의 무능으로 나라가 휘청거리게 되는 사건은 큰 사건들이다.

B2B, B2G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정보를 ‘남들에게 받아서’ 전달하는 것은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초대형 언론사들을 활용하는 경우 밖에 없고,

그게 아니면 결국 본인이 직접 찾아나서야 ‘돈’을, ‘명성’을, ‘파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애플 같은 빅테크 회사가 절대로 AI 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머신러닝’을 이용한 고객 편의 서비스를 만든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칫 AI라는 단어를 썼다가 나중에 거짓 홍보라며 고소 당하는 사태를 철저하게 방지하기 위한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다.

꼭 기자가 아니더라도 밖에는 자기들을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하이에나들이 들끓고 있다는걸 알기 때문에 그런 전략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 회사 홍보 팀에는 분명히 A 타입과 B 타입의 인력들이 있을텐데

  • A타입: 일단 AI를 왜 쓰면 안 되는지 몰라서 문구들 500개쯤 뽑아봤어요. 테크 팀에서 골라주세요
  • B타입: 아마 이런저런요런 이유로 AI 쓰면 안 된다고 하실텐데, 요렇게 ‘머신러닝’으로 대체하면 괜찮겠죠?

둘 중 어느 타입에 회사에서 살아남을지는 당신들도 상식이 있다면 알 것이다.

 

속칭 SKY, SKP 같은 스펙 좋은 학교 나온 애들이 왜 대기업 갔다가 얼마 안 되어서 발 빼고 나오냐고?

왜 석박가고 유학가고, 하다못해 스타트업으로 ‘탈출’하냐고?

윗 사람들이 모조리 A타입이니까. 근데 자기는 B타입이 되고 싶으니까

 

직군의 수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업무 내용이 바뀌었는데 모르고 있을 뿐

기자라는 직군의 수명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B2C 시장, 특히 정치, 연예라는 주제에서는 사실상 끝난 상황이 왔다.

남은 시장은 ‘대중이 열광하며 몰리지 않는’ 시장들 밖에 없는데, 그 시장은 대부분 상당한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잘 정리하는게 기자의 일’인 것은 맞지만, 이해해야하는 지식의 깊이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Financial Math로 박사 전공을 바꾸던 시절, 경제학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2012년에,

내 연구 주제였던 Systemic risk를 거시경제학 쪽에서 연구하던 선배들이 수익률곡선제어(YCC)에 대한 초기 논의를 했었는데,

그 분들이 초단기 이자율 움직임과 장기 이자율 움직임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신 끝에 YCC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난 시뮬레이션하고 Risk measure하는 수학 모델 만드느라 그 쪽을 더 쳐다보지도 못했었는데,

요즘보면 한국은행 정도에서도 YCC라는 개념이 보고서로 나오고, 경제신문 기자들도 그걸 ‘최소한 받아적기는 하고 있는’ 상태가 됐다.

‘한국’ 주제에 학계에서 언급되지 시작한지 10년 남짓 된 개념을 ‘언론’에서 언급할 수 있다고?

 

여전히 한국은행 정도에서 Yield curve 모델을 Mean-reversion하는 continuous time 모델을 바탕으로 dW1t, dW2t… 같은 방식으로 risk factor들을 추가하는 모델링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보기는 쉽지 않겠지만,

YCC가 경제 신문 기사에도, 그것도 한국 경제 기사에 나올거라고 10년 전에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었다.

한국 사회의 지적 역량에 대한 존경심이 0으로 수렴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사건은 꽤나 충격적인 일인데, 찾아보니 의외로 자주 있더라. 한국도 짱구는 아니니까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된 거겠지?

다시 10년이 더 지나고 나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지식을 갖춰야 경제 신문사들에서 인터넷 기사 편집 팀으로 쫓겨나진 않을 것이다.

 

SVB 파산 이야기 나왔을 때 한국은행의 어느 보고서가 Systemic event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는 표현을 쓴 걸 보고

‘어쭈, 2016년에 Systemic risk 정의도 몰라서 물으러 오던 녀석들이 많이 컸네?’라고 생각했었는데,

한국이 미국 비해서 속 터지고 느리게 변화하는건 맞지만, 어찌됐건 가만히 정체된 시장은 아니다 싶더라.

 

기자 분들, 현재 상태론 기렉시트해봐야 어느 기업 홍보팀, 아니면 PR 전문 회사 정도가 한계다.

거기 가서도 신문사 기자 경력에서 나온 네트워크로 어느 기업 보도 막아주는거 전문 인력이 될텐데,

더 이상 전직 기자 출신들만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는 시대가 왔다.

 

‘잘 정리하는 것’은 맞지만, 그 전에 그렇게 정리해야되는 지식이 탄탄하게 쌓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기자가 아니라, 전문성을 글로 표현하는 기자 업무를 하다가 재미없으니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다른 분야로 빠질 수 있어야 기렉시트가 되는거지.

경제 신문사 출신 기자들이 VC하고 IP 투자하는 실력파가 되는 시대가 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기렉시트’가 되는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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