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학고 자퇴한 영재의 도전 속에 숨겨진 선수학습과 입시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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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ii research

백강현이라는 10살짜리 어린 영재가 서울과학고에서 1학기를 겨우 버티고는 자퇴를 선택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런저런 논란이 되어버린 탓에 본인이나 주변 관계자들의 마음 고생이 많을텐데,

영재(?)와는 꽤 거리가 있는 인생이었지만 특목고, S대 같은 속칭 ‘천재들의 모임’ 조직을 거쳐봤던 입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2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80등 안에 들겠다”

는 구절이다.

출처=백강현 유튜브

 

정원 120명 학교에서 전교 80등 안에 드는게 목표?

고작 정원이 12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에서 전교 80등 안에 드는게 목표다?

말을 바꾸면 저 학생의 1학기 성적은 학교 전체의 하위권… 아니 최하위권이었다는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아마 81등이었으면 목표를 80등으로 잡는게 아니라 정원의 절반인 60등 정도는 잡지 않았을까?

 

카톡 대화를 봐도 그렇고, 그간 알고 있는 서울 지역 최고 명문 특목고들 사정을 기반으로 가늠해봐도 그렇고,

부모 욕심에 애가 고생하다가, 최소한 주변 학생들보다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민폐만 끼치다가 자퇴를 선택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지극히 객관적인 관점일 것이다.

 

주워 듣기로 서울 근교의 명문 특목고들은 TOEFL 성적이 iBT 기준으로 120점 만점에 118점만 되어도 불안해서 다시 시험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

Speaking section에서 26/30점을 받아 합계 116점이 인생 최고점인 내 입장에서는 벌써 넘사벽인 점수인데, 그게 부족하다고?

내가 유학을 떠나던 시절에 모 영어 시험 관련 커뮤니티에서 U Chicago가 Speaking을 26점 이상 요구하는게 너무 버겁다며, 이걸 맞출 수 있는 한국 토종이 있냐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내가 한국 토종인데 26점 겨우겨우 받았다고 댓글을 달았더니 공부법을 알려달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뭐… 그냥 다 외우고 내 딴에는 이 정도면 30점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도 고작 26점이더라.

그럼 28점도 부족해서 29점, 30점을 받으려고 시험을 또 치는 명문 특목고 지망생들이 얼마나 영어를 잘할지 대충 짐작이 되실 것이다.

 

이미 그렇게 ‘선수학습’을 왕창하고 간 애들 틈바구니에서 ‘머리만 좋은 애’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보다 저 어린 학생이 훨씬 더 머리가 좋을테니까 1:1 비교는 어렵겠지만,

엄청난 양의 선수학습을 하고 고등학교를 들어온 ‘강남애들’과 경쟁해본 경험은 어느 정도 공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억수같이 좋아 집 주변의 모 특목고에 기적같이 합격했었는데,

고교 3월 입학 전, 1월에 특별 교육을 시킨다고 그러길래 학교를 가봤더니 이미 ‘공통수학의 정석’은 3번 봤고,

문과인데 ‘수학I의 정석’ 뿐만 아니라 ‘수학II의 정석’까지 다 시커멓게 된 책을 막 쓰레기통에 버리던 고교 동기가 기억난다.

너무 낡아서 못 쓰겠다고 새 책을 사야겠단다.

그렇게 잔뜩 준비해 온 동기도 학교에선 ‘상위권’ 이었지 ‘최상위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난 그런 준비를 하나도 안 한 상태에서 뭐 어찌어찌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만 갖고 고등학교에 갔었는데,

3월 입학식날 치른 국어/영어/수학 3과목 실력평가 시험에서 125등/179등/41등 (전교 180명)이었다.

영어 179등은 공동 179등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었고, 우리 반에 178등, 공동 179등 3명이 다 모여 있어서

애들이 매번 공동 금메달과 동메달이라고 놀렸었다.

 

그 시절에 기숙사 들어가면 몰래 화장실에 나와서 공부하며 악착같이 버텼는데,

메달권을 탈출하는데 반 년, 180명 중에 100등 안쪽으로 들어가는데는 1년 반이 걸렸다.

선수학습 없이 들어온 애들 중에 그래도 나처럼 따라잡은 애들은 좀 사정이 나았는데,

학교 다니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고통인 애들도 많았고, 나도 고등학교 친구들 만나기 싫은데 걔들은 더 싫을 것이다.

 

그나마 남들보다 좀 더 재능을 타고 난 수학은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무렵부터 생존 경쟁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답안지를 공급하는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초등 6년 + 중등 3년간 선수학습을 받고 주말이면 최고급 강사진에게 학원 수업을 듣는 그 애들을

다른 과목에서 재능 없이 순수하게 내 역량으로만 따라잡는건 고교 3년만으로는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2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금수저’에게 주어지는 선수학습+고급교육의 혜택없이 그 문을 뚫은 경우는

나를 비롯해서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S대에서도, 석박 유학 중에도 가끔 나처럼 ‘흙수저’의 굴레를 자기의 재능과 자신을 갉아먹는 노력으로 극복한 경우들을 몇몇 봤는데,

언제나 그렇게 고생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항상 우리는 그 조직의 최하위권으로 시작했었다.

 

어쩌면 부모들이 너무 못 됐다 싶은게, 애가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는지는 모르고,

자기 아들이, 딸이 어느 학교를 갔다고 자랑하기 바쁜 경우들을 너무 많이 본다.

2010년도 초반에 KAIST가 실업계고 특별전형으로 받았던 학생들 몇 명이 성적 비관으로 자살한 사례도 그렇고,

‘동기’라는 애들보다 월등하게 실력이 모자란데도 불구하고 별 지원없이 너 혼자서 알아서 살아남아라고 하는 요즘의 학부모들도 그렇고,

당신들이 그런 도전을 해 봤으면 똑같은 ‘교육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묻고 싶을 정도다.

 

SIAI 운영 관련한 단상

어린 시절 특목고에서 1/3 정도가 탈락하던 걸 생각해보면,

요즘 SIAI 운영하면서 받은 학생들 중에 절반 정도가 나가 떨어지는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합리적인 거구나는 걸 깨닫게 된다.

많이 받아주는대신 성적으로 칼 같이 쳐내는 해외 대학교들 경험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그 쪽에는 선수학습이라는게 보편화 되어 있질 않으니 모두가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하는거고,

한국은 선수학습이 워낙 잘 발달되어 있어서 몇몇 지역 출신들은 남들보다 몇 년을 앞서서 뛸 수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

 

고교 시절에도 ‘부적응자’인 애들은 결국 자기 스스로 ‘왕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쪽팔리고, 부끄럽고, 뭐 같이 해야될 때 미안하거든.

SIAI에도 남들은 다 푸는 시험 문제를 자기는 못 푸니까 너무 괴로운 표정인 학생들의 우울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조별 과제에서 유령 취급? 점수 받아야 되는데 너 때문에 점수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누가 도와주려고 할까?

심지어 118점은 떨어진다고 쫄아붙을 정도로 경쟁이 그렇게 치열한 조직에서?

안에선 그런데 밖에 홍보되는 내용은 ‘영재’라고 그러니 정보가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어이가 없었으니 이렇게 큰 논란이 됐을 것이다.

 

난 석차를 1등부터 꼴등까지 매기는 방식이 아니라, 난이도를 높이고 점수제 방식으로 평가하는 교육을 운영하지만,

석차와 관계없이 남들은 다 따라가는데 자기는 못 따라가는 학생마저 배려해주기는 어려운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안하지만 그런 학생들은 ‘강남’의 ‘금수저’들 방식으로 어디에 돈을 더 주고 따로 공부해야 겨우 살아남을 것이다.

그간 경험상, 그마저도 힘들지도 모르고, 사실 그렇게 사교육이 불필요해야 좋은 시험 문제, 좋은 교육이겠지.

 

중도 자퇴한 저 어린 영재도 그렇고, 당시 내 고교 시절 친구들도 그렇고,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선수 학습’을 하나도 안 받고 오직 자기 힘으로만 부딪혀 볼려다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이 사교육으로 선수 학습이 잘 되도록 만들어져 있으니까 이걸 좀 쉽게 이야기하면

재능충+부모님 재력 vs 재능충

의 싸움인데, 후자쪽 ‘재능충’이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경우가 아니면 따라잡는건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SIAI 교육은 사교육으로 이득을 보기 어려운, 전형적인 해외 명문대 교육이기는 한데,

그래도 학부 시절에 잘 배워온 학생들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것은 똑같다.

학부에서 통계학을 고급 레벨로 탄탄하게 배워 온 경우가 아닌 사례들 중 생존한 케이스로 줄여보면,

대부분이 SKY, SKP 같은 국내A급 명문대, 고교 특목고 -> 학부 유학파 같은 사례들이다.

위의 카테고리에 안 들어가는 경우 중에 살아남은 학생들은 내가 손가락 부러질 때까지 펜 잡고 공부하던 시절이랑 맞먹게 이 악물고 공부한 경우 밖에 없더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벌에 관계없이 열심히만하면 다들 살아남을 수 있다고 꾸준히 강조했었다.

반대로 SKY, SKP 출신인데도 극복 못하고 도망가는 경우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학생들한테 학부 2~3학년 수준 교육은 inability가 아니라 poor attention이라고 강조했던 이유다.

 

저 위의 과고 자퇴 사례를 보면서, 어쩌면 poor attention이 아니라 inability라는 걸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비슷한 사례를 SIAI 운영 중에도 여러 차례 만났었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인지를 못했지 않았나 싶더라.

어느 수도권 대학 통계학과 수석 졸업이라던 여자애 하나가 MSc Data Science 입학 시험 수업 (MBA AI/BigData 첫 학기 첫 수업과 거의 동일) 듣다가

시험일 오전에 ‘몸이 너무 힘들고 병까지 나서, 이렇게 병 나는 공부를 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포기 선언을 했었다.

 

나도 저건 못하겠다 싶은 주제들은 손 놓고 살고, 세상에 손 놓고 사는 주제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오히려 아무리 노력한다고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

inability는 아니겠지만 full attention을 위해서 자기 역량의 200%, 300%까지 발휘해야 되는 도전이라면,

굳이 인생을 그렇게 갉아먹으면서 살아야 할까?

 

그간 입학 문을 낮추는 것이 학생을 위한 진정한 배려,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기회의 공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입학 문을 매우매우 높게 설계하는게 더 학생을 위한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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