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무실한 ‘규제 샌드박스’의 실증특례, 근본적 문제에서 눈 돌리는 정부

혁신 서비스 실증 지원하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 현장에서는 ‘무용지물’ 각 부처의 복잡한 제한 조건, 도로 아닌 ‘사유지’에서 맴도는 자율주행 차량들 정립되지 않은 자율주행차 보험 체계, ‘책임보험’은 의무화했지만 가이드라인은 전무 본질적 문제는 외면하는 정부, ‘생색내기’ 개선 아닌 현실적인 개선 방안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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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ICT 규제샌드박스

규제 샌드박스 제도로 실증특례를 받은 기업들이 제대로 된 성능 검증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규제 샌드박스는 혁신 신제품과 서비스의 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일정 조건에서는 신사업·신기술에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제도로, 현재 5개 부처·6개 분야에서 운영하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허점으로 곤혹을 겪는 대표적 분야는 자율주행이다. 2019년 제도 도입 이후 자율주행 관련 규제특례를 받은 기업은 40개 사 안팎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규제특례가 사실상 기술 실증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호소가 나온다. 안전한 자율주행을 위해서는 다양한 환경에서 수차례 실증을 거쳐야 하지만, 복잡한 부가 조건으로 인해 실제 서비스 적용 여부를 확인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유명무실한 책임보험 역시 문제로 지목된다. 사실상 제대로 된 실증을 진행할 수 없어 단 한 차례도 배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보험사가 가이드라인도 없이 위험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하지만 정부는 이 같은 핵심적 문제에서는 눈을 돌린 채 ‘규제 샌드박스 승인 패스트트랙’ 등 부가적인 개선 조치만을 내놓으며 업계의 비판을 사고 있다.

수많은 제한 조건, 유효한 기술 실증 불가능하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도로교통법상 특례를 인정받은 자율주행 기업들 대부분은 “보행자나 장애물이 없는 사유지에서나 기술 성능을 검증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자율주행이 이뤄지는 도로 등에서는 사실상 실증이 불가능해 기술 검증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 따라붙는 복잡한 부가 조건에 있다. 현재 자율주행 배달 로봇 실증특례는 승인 부처마다 부가 조건이 다르게 명시되어 있다. 이에 더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물론 경찰청, 행정안전부 등 관계부처에서도 저마다 다른 조치 이행을 요구하며, 지자체 개별 조례에 따른 추가 조치까지 준수해야 한다. 각종 조건이 복잡하게 얽히며 사실상 위험이 수반되는 도전적인 실증이 어려운 상황인 셈이다.

의미 있는 실증이 불가능하니 의무화된 보험 가입도 무용지물이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실증특례를 위해 반드시 책임보험에 가입하도록 하고 있다. 시장에 출시되지 않은 제품과 서비스를 실증하는 도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실증특례를 받은 기업에 책임보험에 따른 배상이 이뤄진 사례는 아직 단 한 건도 없다. 이에 업계에서는 책임보험 배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기업의 기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과도한 제한 조건으로 사실상 유의미한 실증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자율주행 차량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보험사가 어떻게 위험을 평가하고, 보험료를 책정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실제 보험업계는 자율주행 규제 샌드박스 도입으로 기존에 없던 다양한 위험이 예상되지만, 정작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 손해율 등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어려움이 있다는 입장이다. 각기 다른 실증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보험 상품도 현시점에는 사실상 없다.

사진=현대자동차그룹

‘자율주행차 보험’ 관련 논의 여전히 진행 중

자율주행차의 자율주행 기술은 레벨 0부터 5까지 총 6단계로 분류된다. 조건부 자동화 단계인 레벨3은 자율주행 모드로 운전하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운전자가 개입하는 방식이며, 레벨4에서는 특정 환경이나 위험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모두 자율주행 시스템이 대응하게 된다. 레벨5는 운전자가 필요 없는 완전 자동화 단계다.

우리나라는 올해 레벨3 단계의 자율주행차를, 2027년에는 운전자 개입이 필요 없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차를 상용화할 예정이다. 앞서 정부는 레벨3 자율주행차 상용화에 대비해 지난 2020년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을 개정한 바 있다. 해당 법안은 기존 자동차 사고에 적용되는 운행자 책임을 레벨3의 자율주행차 사고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문제는 레벨4의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냈을 경우다. 레벨4 이상의 자율주행차는 자율주행 모드에서 운전자가 제어권 전환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 주행 상황에서 운전자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의무가 레벨3 대비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로 인해 사고가 발생할 경우 운전자는 물론 자율주행 제작사, 라이다 등 센서나 AI 개발사까지 책임 대상에 포함될 여지가 있다.

이로 인해 자율주행차 보험 정비를 위한 논의는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레벨4 자율주행차 사고 발생 시 형사 책임 귀속 주체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일각에서는 레벨4 이상 자율주행차 사고가 발생할 경우 자율주행 통신서비스 제공자에 대해 전기통신사업법상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통신장애 발생 시 센서에 의한 단독 자율주행으로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제작할 의무를 위반한 책임이 자율주행차 제작사에 돌아간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결함에 대한 제조물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현재 자율주행 차량에 대한 보험 체계는 관련 업계에서조차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이 같은 상황에 자율주행 기술 실증을 위해서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조차 제시하지 않는 실증특례 요건은 보험사에도, 기업에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시장의 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술적 도전을 제한하는 조건이 대다수 겹치며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의미 없는 개선 이어져, 원점부터 재점검 필요

정부는 지난 1일 규제 샌드박스 승인 기간을 대폭 줄이는 ‘신속처리절차(패스트트랙)’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법제처는 이같은 내용을 포함한 ‘산업융합 촉진법’ 개정안을 2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 입법 예고했다. 심의 대상이 기존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은 신제품이나 서비스와 내용·방식 등이 유사하거나 동일한 경우 승인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현행 규제 샌드박스 제도에서 개선이 필요한 것은 ‘승인 기간’이 아니다. 실증특례를 받은 기업들이 현장에서 제도의 본질적인 목표인 ‘혁신 기술 실증’에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승인 기간이 짧아진다면 기술 실증에 난항을 겪는 기업의 수가 증가할 뿐이다. 하지만 정부는 현실적인 애로사항에서는 눈을 돌리고, ‘생색내기식’ 개선에만 힘을 쏟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부 기관 측에서 책임 회피를 위해 제도 개선을 미룬다는 비판마저 제기된다.

혁신 기술의 실증이 미뤄지면 기술 발전 자체가 지연된다.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스타트업들이 기술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로 정체되는 것이다. 자율주행을 예로 들어보자. 차후 해외 기술 선진 국가에서 자율주행 기술이 개발 및 상용화되어 국내로 유입된다면, 제도적 한계에 발목을 잡혀 실증을 거치지 못한 스타트업 기술은 무용지물이 된다. 이후 마케팅 기반을 갖춘 국내 대기업이 유사 상품을 출시하면 스타트업은 그사이에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이처럼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현재 본분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샌드박스 제도의 ‘원점’부터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제도의 본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처마다 내거는 복잡한 부가 조건을 명료화하고, 책임보험 등 보호 체계가 명확하게 동작할 수 있도록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명확하다. 차후 우리나라 혁신 기술 및 스타트업계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 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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