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 속 자취 감춘 ‘카푸어’, 또다시 경차가 뜬다

레이·모닝 등 경차 불티나게 팔려, 경기 침체기 ‘경차 열풍’ 돌아왔다 전기차 시장에서도 경차 인기? 기아 ‘레이 EV’ 인도 3~4개월까지 밀려 과소비 고집하는 ‘카푸어’ 살아남을 수 없다, 가성비에 목매는 소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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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뉴 기아 레이/사진=기아자동차

국내 경차 수요에 불이 붙었다. 경차의 신차·중고차 판매량이 나란히 급증하는가 하면, 사전 예약을 시작한 기아자동차의 레이 EV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인도 지연’ 대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고유가·고금리 및 경기 침체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를 휩쓴 ‘고급 차 열풍’이 슬그머니 사그라든 것이다.

신차도 중고차도 경차라면 ‘불티’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8월 국내 경차 등록 대수는 1만278대로 전월 대비 3.7%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체 차량 판매가 11.6% 감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방’한 셈이다. 차종별로 살펴보면 레이가 3,793대의 판매량을 기록해 6위에 올랐으며, 이어 7위 캐스퍼(3,692대), 10위 모닝(2,762대) 순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신차로 판매되는 경차 3종이 모두 10위권에 든 것이다.

중고차 시장에서도 경차 수요가 두드러졌다. 자동차 통계 전문업체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8월 국산 중고차 거래에서 순위권에 든 경차는 총 4종이다. 1위는 모닝(4,103대)이었으며, 이외에도 △스파크(3,605대, 3위) △기아 레이(2,358대, 5위) △기아 뉴 레이(1,960대, 9위)가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국내 시장 ‘경차 열풍’을 입증했다.

경기 침체의 먹구름이 좀처럼 걷히지 않는 가운데, 경차의 인기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경차는 가격이 저렴한 것은 물론, 취득세, 주차비, 통행료, 보험료 등 각종 감면 혜택이 있어 침체기의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차량 유지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은 소비자의 ‘절약 수요’가 줄줄이 경차로 몰리기 때문이다.

경차는 연비 방면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대표 경차로 꼽히는 모닝은 15.7km/ℓ, 레이는 13km/ℓ 연비를 갖췄다. 기아가 지난 7월 출시한 ‘더 뉴 모닝’은 가솔린 1.0 엔진과 4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15.1㎞/ℓ의 복합연비를 갖추고 있다. 국내 대표적 세단 모델인 그랜저의 연비는 10km/ℓ 내외다.

기아 ‘더 뉴 모닝’/사진=기아자동차

경차 열풍, 전기차 시장까지 접수하나

유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경차 열풍이 전기차 시장까지 확산하는 경향도 포착된다.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달 5주차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은 전주 대비 4.2원 오른 ℓ당 1,744.9원을 기록, 8주 연속 상승했다. 서울의 경우 이미 ℓ당 1,824.0원으로 1,800원 선을 돌파한 상태다. 고유가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은 ‘전기 경차’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아자동차 ‘레이 EV’의 흥행은 이 같은 소비자 수요를 고스란히 입증한다. 기아는 지난달 24일부터 레이 EV 사전 계약을 시작했다. 신차의 트림별 가격은 △4인승 승용 라이트 2,775만원, 에어 2,955만원 △2인승 밴 라이트 2,745만원, 에어 2,795만원 △1인승 밴 라이트 2,735만원, 에어 2,780만원이다. 여기에 국고보조금(512만원)과 지자체 보조금 등을 더하면 지역에 따라 1,000만원 후반대에도 차량을 구매할 수 있다.

경차 열풍 속 레이 EV는 높은 사전계약률을 기록했으며, 수요 폭증으로 인한 ‘인도 지연’ 대란마저 벌어졌다. 기아 측이 정확한 사전 계약 대수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레이 EV의 예상 출고 기간이 3개월~4개월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경차 모닝의 출고 기간은 3주~4주에 불과하다.

레이 EV가 성공을 거둔 가운데, 현대자동차 역시 내년 캐스퍼 전기차 모델 출시를 앞두고 있다. 국내 완성차 업체가 속속 전기 경차 시장에 뛰어들자,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경차들이 전기차 시장에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더 기아 레이 EV/사진=기아자동차

고가 차량 집착하는 ‘카푸어’의 시대 갔다

올 초 ‘허세플레이션(허세+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허세플레이션은 소비자들이 과시를 위해 고가의 제품·서비스를 마구 사들이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코인, 주식,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뛰자 ‘과시’를 위한 소비가 급증하고, 이에 대한 모방 소비까지 늘며 거대한 ‘사치 유행’이 번진 것이다. 명품 구매를 위한 백화점 오픈런 유행, 고가의 ‘오마카세(주방특선)’ 식당 유행, 고가 자동차 유행 등이 허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자동차는 소비자의 ‘경제력’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제품으로 꼽힌다. 이 같은 인식에 허세플레이션 바람이 더해지자, 자신의 수입이나 자산에 비해 비싼 차를 구입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카푸어(자동차와 가난(poor)의 합성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 달 수입의 80% 이상을 차량 할부와 유지비에 쏟아부으며 외제 차를 고집했다.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고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차량 유지비가 급등하자 운전자들은 브랜드 및 가격이 가져다주는 ‘이미지 프리미엄’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당장 유지비를 절감할 수 있는 경차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카푸어 감소와 경차 열풍은 ‘보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에 급급한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거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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