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발된 복수의결권, 업계 “반대 위한 반대는 이제 그만”

복수의결권, 지난달 이어 또 다시 묶였다 실망감 감추지 못하는 벤처업계, “대체 혁신은 언제” 반대만 해선 바뀌는 것 없어, 다음 번엔 숙원 이뤄질까

pabii research

벤처·스타트업 복수의결권 도입 법안이 또 한 번 좌절됐다. 당초 반대 의사를 피력하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다수 의결을 따르겠다며 한발 물러섰으나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쟁점 없이 논의만 길어지는 만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다음 전체 회의에서 해당 법안을 재논의·처리할 방침이다.

국회 법사위는 27일 전체 회의에서 복수의결권 도입을 담은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 일부개정안을 계류 처리했다. 복수의결권이란 비상장 벤처·스타트업이 창업자에 한해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가진 주식, 일명 ‘황금주’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투자 유치 이후 창업자의 사내 지분이 희석되더라도 창업자들이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복수의결권의 골자다.

그간 복수의결권은 벤처기업계의 숙원 중 하나로 꼽혀왔다. 복수의결권을 통해 ‘황금주’를 발행받을 수만 있다면 창업자가 지분 희석 리스크 없이 대규모 자금을 투자받아 혁신성장을 보다 활발하게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업주에게 ‘황금주’가 주어지면 적대적 기업 인수 위협이나 단기적 수익 압박에서 벗어나 장기적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고, 경영권 상실의 우려가 완화되므로 IPO(Initial Public Offering, 기업공개)를 통한 자본 확충을 앞당길 수도 있다. 벤처기업계가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법안인 셈이다.

정부·국회 호응했지만, 결과 좋지 않아

정부와 국회도 벤처업계의 목소리에 적극 호응했다. 윤석열 정부는 복수의결권을 국정과제로 정했고, 민주당은 2020년 총선 2호 공약으로 복수의결권을 내걸었다. 21대 국회가 들어선 이후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관련 법안이 말 그대로 쏟아져나오듯 했다.

그러나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기대되던 해당 법안은 법사위에서 발목이 잡혔다. 이날 법사위에서도 박 의원과 조 의원이 강력히 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나섰다. 박 의원은 주주 평등 원칙 위배 및 실효성 문제 등을 들어 반대 의견을 보였고, 조 의원은 △VC 도덕적해이 유발 및 벤처 버블 우려 △상장 후 일몰조항 폐지 유예 또는 폐지 가능성 △재벌 대기업 세습 악용 등을 우려하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특히 조 의원의 반대 목소리가 커 법안은 결국 계류 처분을 면치 못했다.

박 의원은 “지분이 많지 않은 소액 주주가 의결권 행사에 큰 제약을 받을 수 있다”며 “무능력한 경영진까지 과보호할 우려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의원은 “VC 대부분이 정부 모태펀드로 벤처펀드를 조성하는데 의결권까지 없으면 모태펀드는 보조금 기관으로 전락할 뿐”이라며 “재벌세습 악용 가능성도 높다. 이를 막기 위해 복수의결권 주식은 상장 후 3년 뒤 보통주로 전환한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벤처업계에선 활용할 사람이 2%밖에 안 된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벤처업계 “반대 위한 반대는 그만”

실제로 복수의결권은 일장일단이 있는 제도다. 한편으론 기업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만, 한편으론 경영의 참호화를 심화시키고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때로는 복수의결권이 오히려 기업가치를 떨어뜨려 자본 확충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벤처업계는 이 같은 반대는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복수의결권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이미 보완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선 복수의결권이 담긴 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시장에 충분히 도입 가능한 ‘무르익은’ 개정안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박 의원이 언급한 주주 평등 원칙 위배다. 업계는 사전에 정부가 제출한 법안으로 인해 주주 평등 원칙 위배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 상법 제388조 이사의 보수 및 책임에 관한 부분에서 복수의결권 주식을 1주마다 1개의 의결권만 가지도록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감사의 선임 및 해임, 이익의 배당에 관한 사항도 의결권 행사를 제한해뒀다.

벤처기업법 개정안엔 경영진의 편법 승계를 막고 소액주주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정부가 제출한 법안에 따르면 벤처기업 창업주의 복수의결권 주식은 존속 기간이 10년으로 제한된다. 또한 기업이 성장하면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보통주로 전환해야 한다. 창업주가 주식을 상속하거나 이사직을 상실하면 즉각 복수의결권도 소멸되는 것이다.

벤처기업은 씨앗, 발아 없는 국가에 혁신은 없어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 법사위에서까지 법안 통과가 좌절되자 업계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최근 투자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법안 통과 좌절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윤건수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은 “우리나라는 대표 지분이 5% 미만이면 경영 안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상장을 안 시키는 경우가 있다”며 “올해 투자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복수의결권까지 계류됐다. 시장이 더욱 위축될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복수의결권 제도는 단순히 창업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아니다. 창업자가 안정적인 경영권을 기반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복수의결권 제도가 제때 도입되지 않아 자신이 직접 일군 회사에서 쫓겨난 대표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실제 메쉬코리아의 유정범 전 대표는 지분 문제에 따른 내홍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왓챠의 박태훈 대표는 투자 유치를 위해 회사를 매각하라는 압박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 메쉬코리아는 이후 hy에 매각되기까지 했다.

반대 측 입장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황금주 도입으로 한국형 ‘뒤틀린’ 발렌베리 가문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처업계에선 오히려 제도적 보완을 거치며 황금주로 인한 실익을 많이 양보해 그럴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복수의결권의 존속 기간이 10년으로 제한되면서 상장을 준비하는 수많은 혁신 벤처기업들이 구태여 한국을 택할지 의문이 든다는 지적도 나온다. 복수의결권 계류를 지켜봐야만 하는 업계의 입맛이 더욱 씁쓸해지는 이유다.

이제 갓 시작하는 벤처기업은 규제의 대상이 아닌 자라나야 할 씨앗이다. 씨앗의 발아 없이 혁신은 이뤄지지 않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래를 가정해 반대만 한다면 도대체 언제 어떻게 혁신하겠단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꼬집었다. 맞는 말이다. 미래가 두려워 반대만 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벤처업계의 숙원이 다음 법사위에선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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