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계약조건 뜯어고치는 신규 투자자와 굴욕 감수하는 기존 투자자

미국 스타트업들, 다운라운드 피하려 계약조건으로 신규투자자에 당근 제시 경영 위기 겪는 스타트업과 기존 투자자들, 속절없이 신규투자자에 끌려가 내년 하반기까지 버티기 모드로 들어간 스타트업 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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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 시간) 벤처기업 투자 전문지인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글로벌 경기침체를 맞아 후속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먼저 제시하는 벤처기업들이 늘어나는 모습이다.

톰베스트 벤처스(Thomvest Ventures)의 돈 버틀러 상무이사에 따르면 기존 투자자들이 ‘모든 채권자 동등 요건(Pari-Passu)’를 받아들일 때에도 신규 투자자들은 자신들만의 특정 요건을 강하게 요구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급격하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자금 소진으로 여력이 없는 벤처기업들과 기존 투자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신규 투자자들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배당률 상승 중인 미국 상황/출처=Pitchbook

신규 투자자가 ‘갑’이 된 상황

경기침체를 맞아 투자가 위축되자, 벤처기업 경영진은 지분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신규 투자자에게 가치 하락 대신 투자보호 요건 강화 등의 각종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데빈 왓틀리 에코시스템 인테그리티 펀드(Ecosystem Integrity Fund) 상무이사는 코로나-19 초기부터 이미 ‘페이투플레이(Pay-to-Play)’를 목격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투플레이는 단어 그대로 ‘플레이’, 즉 현재의 주주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페이’, 즉 투자를 하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업가치가 하락할 경우 기존 주주들은 추가 투자를 꺼린다. 신규 투자로 이미 지분이 크게 희석되는 데다 첫 투자 때보다 크게 하락한 기업가치를 기준으로 추가 투자를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투자 손실을 키우는 꼴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페이투플레이는 이전 투자 때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받는 다운라운드(Down Round)에서 주로 사용된다. 해당 투자가 죽어 가는 기업을 살린 것인 만큼 신규 투자자는 우월적 지위로 기존 투자자들에게 페이투플레이 조건을 주장한다. 기존 주주들의 부정적인 후속 투자로 인해 존폐 기로에 놓인 기업으로서는 페이투플레이를 내건 대규모 투자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운라운드 맞아 신규 투자자에게 각종 ‘당근’ 제시할 수밖에 없어

안드레아 슐츠 그랜트 톨튼(Grant Thornton) 감사 파트너에 따르면 최근 들어 이사회 의석 추가 요구, 회사 매각 및 IPO 시 2배, 3배의 추가 지분 요구 등을 제시하는 경우도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2배 잔여재산 우선분배권 (2x Liquidation Preference)’은 회사가 청산, 매각, 지분 정리 등이 일어날 때 투자 원금의 2배, 3배를 요구하는 조건이다. 일반적으로 투자처의 수익성이 나쁠 것으로 예상될 때 삽입하는 투자요건이지만 최근 들어 다운라운드가 많아지자 신규 투자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요구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어 회사 지분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보다 신규 투자에 복잡한 구조를 넣어서라도 회사 가치를 유지하는 편이 더 도움된다는 판단 아래, 창업 경영진이 먼저 요구하는 경우도 증가했다고 설명한다. 한번 회사 가치가 떨어지고 나면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스톡옵션 등을 받은 직원들이 의욕을 상실하고 퇴사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애론 플레이쉬만(Aaron Fleishman) 톨라 캐피털(Tola Capital) 파트너는 잔여재산 우선분배권이 2배를 넘어 3배, 4배가 되는 경우도 흔히 목격된다고 답했다. 특히 긴급 자금 수혈이 필요한 브릿지 투자를 받는 경우나 상장 직전 투자들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결국 다음 라운드 투자에서 25%~30%의 회사 가치 인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고 설명했다.

유니콘 지고 ‘낙타’가 뜬다

‘스타트업 웨이브’ 저자 알렉산드르 라자로는 “유니콘의 시대는 끝났다”며 ‘이제는 사막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낙타의 시대가 왔다”고 설명한 바 있다. 국내 스타트업들도 본의 아니게 ‘낙타’가 된 상황이다. 사무실 고정비를 줄이기 위해 공유오피스로 이동하는 사례도 늘었고, 인력을 대규모로 해고하는 경우도 늘었다.

비용 감당이 불가능해진 메쉬코리아는 결국 hy에 매각됐고, 팜테크와 이커머스를 결합했던 그린랩스는 창업 경영진 셋 중 두 명이 지분을 포기했다. 두 기업은 2022년 초까지만 해도 투자 유치에 실패해 자금난을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으나, 결국 경영진이 쫓겨나거나 지분을 내려놓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지난 5월 컬리도 IPO(기업공개)를 연기하고 1,200억원대의 자금을 추가로 유치했다. 기존 투자자가 4조원 가치로 투자했던 반면, 지난 5월 앵커PE의 투자는 약 2조원대 가치로 기업 평가가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IB 업계에서는 1,200억원은 긴급 수혈 자금에 불과하고, IPO가 늦춰진 만큼 컬리도 인력 구조조정을 대규모로 단행하지 않으면 내년 하반기까지 기업 존속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번 긴급 구조성 자금도 다운라운드인 만큼 시장에 알려지지 않은 당근이 앵커PE에 제시됐을 것이라는 설왕설래도 이어진다.

샬리 칸(Shalye Kann) 에너지 임팩트 파트너스(Energy Impact Partners)의 파트너는 ‘낙타 모드’로 들어가 추가 자금 유치를 한 스타트업들이 2024년 하반기까지는 자금 압박을 견딜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이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전망을 내놨다. 한편 국내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우리 회사 런웨이(Runway)가 끝나기 전에 금리 좀 내렸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을 피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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