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소방망 마비? ‘디지털 정부’ 표방한 대한민국의 총체적 난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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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기업전용 LTE망 오류 발생, 소방 긴급 출동 시스템 1시간 마비
행안부가 지목한 이번 사태 원인 '라우터' 포트, 이미 교체했어야
잇단 행정망 먹통 사태로 체면 구긴 '디지털 정부', 실패 사례로 전락할 수도
지방행정전산서비스-장애대채본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12층 중회의실에서 열린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 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행정안전부

최근 연이은 행정 전산망 마비 사태로 국민들이 큰 불편을 겪은 가운데, 서울 소방재난본부 지령망에서도 장애가 발생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전 행정망 마비 원인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미봉책만 내놓는가 하면, 디지털 정부 업적을 자화자찬하며 포상 잔치까지 벌였다. 이번 사태를 키운 주요인으로 정부의 공공부문 사업관리 역량 부족이 거론되는 가운데, 학계 등에선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KT 기업망 오류에 서울 소방망 한때 마비

서울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27일 오전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KT 기업전용 LTE망에 오류가 발생해 긴급 출동 시스템(MDT 서비스)이 마비됐다. 이번 장애로 중단된 MDT서비스는 소방 신고 시 신고 위치 등을 소방차 태블릿에 연동하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이다.

MDT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소방차의 출동 가능 상태를 안내해 주는 기능도 먹통이 된 것으로 파악됐다. 차고에 소방차가 나가거나 들어올 때 위치를 확인해 출동 가능 여부를 표기해 주는 기능이 작동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종합상황실에서는 ‘티맵’을 이용하라고 안내했고, 소방대원들은 지령이 내려오면 지면 출동 지령서와 업무 휴대전화로 직접 위치를 파악해 출동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관계자에 따르면 KT에서 긴급장애 복구를 진행해 오전 10시경 복구가 완료됐다. KT는 이날 오후 입장문을 내고 마비 사태 원인이 된 점을 사과했다. KT는 “서울소방방재센터에 제공하는 인터넷 회선이 작업 오류로 일시 중단됐으나 복구됐다”며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겠다”고 전했다.

행정망-오류
지난 24일 정부 모바일 신분증 시스템 접속 장애 화면/출처=모바일 신분증 홈페이지 캡처

행안부, 이미 장비 노후화 알고 있었다

앞서 지난 17일 정부24 등 행정 전산망 마비를 시작으로 주민등록시스템과 조달청 나라장터, 모바일 신분증 서비스 등이 먹통된 데 이어 이번 소방망까지 일시 마비되면서 국민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정부는 앞선 행정망 마비와 관련해 25일 긴급 브리핑을 열고 “원인은 라우터 장비의 케이블을 연결하는 모듈에 있는 포트 중 일부가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전문가들은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다. 라우터 고장은 전원 콘센트처럼 선을 옮겨 꽂으면 해결할 수 있는 단순 장애인데 일주일의 시간이 소요됐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행정망과 연계된 타 기관의 시스템들에서 줄줄이 장애가 발생한 만큼 라우터 포트만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또한 행안부는 이번 사태의 원인인 라우터 포트 장비가 ‘노후화’된 건 아니라고 일축했으나, 해당 장비는 원래대로라면 올해 교체했어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라우터 장비의 도입일은 2015년 11월 30일로 ‘국가정보통신망 라우터 내용 연수(사용기한 8년)’에 따라 올해 교체해야 하지만 지난해 1월 개정을 통해 9년으로 늘렸다. 그러나 미국 솔루션 기업 시스코가 생산한 해당 부품은 2019년 5월 단종됐다. 즉 이미 단종된 노후 장비의 사용연수를 편법으로 늘리는 등 개선을 미뤄오다 이같은 참사를 초래한 것이다.

심지어 행안부는 이미 장비 노후화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행안부는 지난 2018년 이번에 문제가 된 전산시스템 중 하나인 새올행정시스템의 차세대 시스템 구축을 위해 기획재정부에 예산을 요청한 바 있다.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하면서 당시 노후 장비 교체는 물건너갔으나,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전문성 결여가 낳은 참사

윤석열 정부는 국정 과제로 ‘모든 데이터가 연결되는 세계 최고의 디지털 플랫폼 정부’를 내걸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올해 예산만 5,000억원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번 행정망 먹통 사태로 인해 디지털 정부 선진국을 자처해 온 우리나라는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장비 하나 고장 났을 뿐인데 즉각 복구는커녕 원인도 파악하지 못해 민원 처리가 올스톱됐다. 게다가 정부는 사고원인을 놓고 오락가락하며 국민 불신을 더욱 키웠다. 애초 새올 장애 원인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문제라고 했다가, 뒤늦게 네트워크 장비 중 하나인 ‘L4 스위치’ 오류라고 번복하는가 하면, 장비 교체 후 정상 복구를 장담했으나 이마저도 공수표에 그쳤다. 정부24와 나라장터 마비에 대해선 다량 접속으로 발생한 일시적 과부하가 원인이라고 헛다리를 짚기도 했다. 정부의 전산망 관리 능력과 운영의 총체적 난맥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부 내 정보기술(IT) 컨트롤타워가 부재하다는 것과 관리주체가 분산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현재 정부는 1,400개가 넘는 국가 정보시스템의 개발 및 운영을 부처별로 외부 기업에 맡기고 있는데, 수많은 업체가 운영·보안·설비·관리 등을 쪼개서 담당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별적으로 중구난방 개발되거나, 데이터도 체계적으로 저장돼 있는 게 아닌 정부 서버에 중복으로 저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다 보니 사고 발생 시 신속한 원인 규명이 힘든 것은 물론, 정확한 책임 소재를 따지기도 어렵다. 더욱이 이들을 관리·감독하는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져 화를 키운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도 그럴 것이 IT 기술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자리에 여전히 행정직이 많은 데다, 순환근무로 인해 전문성을 쌓을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번 사태 당시 원인 파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 또한 민간 데이터센터 기업 등과 달리 IT 거버넌스가 제대로 수립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부실 투성이 대국민 서비스를 방치한 채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사고 당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디지털 정부 홍보를 위해 미국과 포르투갈을 순방 중이었다. 전산망 마비 사태로 급거 귀국한 이 장관은 시스템을 완벽히 복구했다고 발표한 뒤 다시 디지털 협력차 영국으로 출국했으나, 그 시간 국내에선 조달청 시스템 에러가 발생했다. 25일에는 디지털정부 추진 성과를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와 행안부는 부산에서 대국민 보고대회를 개최, 디지털정부 추진 성과를 추켜세우며 유공자 표창을 수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연이은 마비 사태 해결을 위해 2013년부터 엄격히 제한해 온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를 넓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지만, 전형적인 뒷북 행정이라는 쓴소리가 잇따른다. 대기업 참여보다 더욱 시급한 사안은 정부의 대응 태세 강화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정부는 사고 직후 발표한 장애 원인부터 조사 결과와 어긋나 빈축을 샀다. 예방은 고사하고 사후 대응조차 엉성했다. 이번에도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지 않고 미봉책으로 눈속임하려 든다면 우리나라는 디지털 정부의 실패 사례로 기록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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