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슈퍼 엔저’에 일본 車 강세, 한국 수출경쟁력 ‘빨간불’

pabii research
도요타·혼다·닛산·스바루 1분기 美 판매 일제히 급증
도요타, 환차익으로 거둔 이익이 전체 영업익의 11%
'슈퍼 엔저'에 철강산업도 타격, 한국 수출 경제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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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차들이 미국·인도 등 주요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전기자동차 ‘캐즘(대중화 직전 일시적 수요 둔화)’을 틈타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수요가 늘어난 데다 역대급 엔저로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체력이 세지고 있다는 평가다. 이에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하이브리드카 모델을 서둘러 내는 등 반격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특히 슈퍼 엔저가 자동차 시장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경합 품목이 많은 한국 수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국내 기업들도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기술력 갖춘 일본 車, 美 시장서 급성장

8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의 주요 자동차 회사의 판매량이 일제히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일본 최대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의 출고량은 전년 동기 대비 20.3% 증가하며 미국에 진출한 글로벌 완성차 회사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판매량은 56만5,098대로 1위 제너럴모터스(GM)의 판매량 59만55대을 바짝 뒤쫓았다.

혼다도 같은 기간 17.3% 증가한 33만3,824대의 차량을 판매하며 4위인 스텔란티스(33만4,841대)를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닛산·미쓰비시(9.5%), 스바루(6.7%), 마쯔다(13.3%) 등도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에 반해 같은 기간 미국 GM(-1.5%)을 비롯해 기아(-2.5%) 스텔란티스(-9.6%) 현대차(0.7%) 폭스바겐(1.1%) 테슬라(4.0%) BMW(1.3%) 등은 판매량이 줄거나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같은 일본 차의 약진은 전기차 대신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카에 집중한 전략 덕분이란 분석이 많다. 실제로 도요타는 지난 1분기 글로벌 시장에서 하이브리드카를 99만 대나 판매했다. 혼다도 2개 모터를 장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앞세워 전기차 캐즘이 낳은 빈틈을 공략했다. 닛산·미쓰비시와 스바루, 마쯔다 등은 내연기관 차량으로 미국 소비자들을 파고들었다.

日 현지 생산하는 도요타, 비용 줄고 매출은 늘어

역대급 엔저도 일본 자동차업체들의 실적 호조에 영향을 미쳤다. 금융 전문매체 배런스는 도요타 하이브리드가 다시 인기를 끈 주된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일본 엔화 가치 약세를 간과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실제 1년 전 달러당 135엔이었던 엔화 가치는 8일 현재 155엔으로 15% 하락했다. 일본은행(BOJ)이 엔화 가치 하락 속도를 늦추기 위해 590억 달러(약 80조6,000억원)를 들여 환 방어에 나섰지만 엔화 가치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엔화는 유럽에서도 유로당 165엔으로 1년 전(149엔)에 비해 11% 폭락했다.

이같은 기록적 엔저는 도요타에 엄청난 이득을 안겨줬다. 도요타는 미국 등 외국에도 생산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일본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값이 싼 엔화로 임금을 지불하고, 일본 부품 하도급사들에도 엔화로 대금을 지급하지만, 생산한 자동차를 수출하고 나면 달러나 유로로 돈을 벌어 엄청난 환차익을 거둘 수 있다. 즉 비용은 낮게, 매출은 높게 유지하면서 수익성 측면에서 이중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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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의 하이브리드 프리우스/사진=도요타코리아

엔저에 따른 환차익은 고스란히 영업이익에 반영됐다. 도요타는 2024회계연도 영업이익이 환차익 덕에 약 35억 달러(약 4조7,810억원) 더 늘어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총영업이익의 약 11%에 이르는 규모다. 환차익이 영업이익에 반영되면서 수익성도 개선됐다. 8일 발표한 도요타의 1분기 영업이익은 1조1,126억 엔(약 9조7,804억원)으로, 같은 기간 현대차의 영업이익 6조9,831억원보다 40% 많았다.

도요타뿐만 아니라 여타 일본 자동차업체들도 엔저 덕분에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비용 증가를 상당 부분 상쇄하면서 향후 인센티브를 늘리는 식으로 판매가격을 낮추거나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이에 미국, 인도 등 주요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는 현대차·기아는 일본 차의 약진에 긴장하는 모습이다. 

현대차·기아는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카 공략을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 전략을 짰다. 이를 위해 오는 4분기 가동 예정인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공장(HMGMA)에서도 하이브리드카를 생산하기로 했다. 기존 하이브리드카보다 힘과 연비를 10%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하이브리드 플랫폼(코드명 TMED-2)의 개발을 마치고 내년 1월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가는 것도 일본 차를 겨냥한 전략 중 하나다.

日 경합 품목 ‘철강산업’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역대급 슈퍼 엔저는 자동차뿐 아니라 한국의 수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도 이미 엔저로 곤혹스러웠던 사례가 있었다. 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집권기인 2013년부터 본격화한 엔저 여파가 누적되면서 2015년 한국 수출은 전년 대비 감소로 돌아섰다. 글로벌 시장에서 엔저로 가격 경쟁력을 등에 업은 일본 상품이 판매 호황을 누리면서 한국산 제품이 고전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는 한국과 유사한 제조업 중심의 수출 구조로 환율 차이가 가격 경쟁력을 좌우하는 직접적 요인이 된다. 더욱이 양국은 철강, 화학, 조선, 자동차, 전기·전자 등 경쟁하는 산업 분야가 많다. 또 산업 구조가 얼마나 겹치는지 보여주는 ‘제조업 수출 경합도’ 역시 일본이 주요 수출국 중 가장 높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이 1%포인트 상승하면 한국의 수출 가격과 물량은 각각 0.41%포인트, 0.2%포인트 하락한다. 실제로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는 철강산업도 타격을 입었다. 국내 철강업계는 중국산 저가 제품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엔저 현상으로 일본 제품과의 가격 경쟁력에서도 밀리며 부진을 겪고 있다. 한국철강협회에 의하면 지난해 중국산과 일본산 철강재 수입량은 각각 873만 톤, 561만 톤으로 전년 대비 각각 29.2%, 3.1%씩 늘어났다. 한국의 전체 수입 철강재 중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철강이 차지하는 비율도 92%에 달했다.

여기에 국내산 열연강판(SS275 기준) 가격은 중국산 제품이 유입되면서 최근 1톤당 70만원대까지 내려간 것으로 파악된다. 수입 열연강판은 국내산과 비교해 5~10% 낮은 가격으로 국내 시장에 공급 중이다. 이같은 철강재 가격 하락은 국내 주요 철강사들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홀딩스의 철강 부문 영업이익은 지난해 2분기 1조원을 넘겼지만,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3,000억원대까지 떨어졌다. 현대제철의 1분기 영업이익 역시 558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83.3%나 감소했다.

日 ‘마이너스 금리’ 해제, ‘슈퍼 엔저’ 연내 종식되나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화 약세 흐름이 이어지겠지만 장기적인 흐름에서는 올해 말 슈퍼 엔저 현상에서 탈피해 엔화가 서서히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한다고 해도 국채 매입 등 시장에 유동성을 푸는 완화정책 기조를 유지한다는 입장인 만큼 엔화 약세에서 벗어나는 속도는 아주 느릴 것으로 전망했다.

앞서 지난 3월 19일 일본은행은 17년 만에 금리를 인상한 바 있다. 8년간 이어지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하고 통화정책 전환에 나선 것이다. 이는 엔저가 수입 물가를 끌어올리면서 소비자물가의 상승 압력으로 이어진 데 따른 조치로 해석된다. 이미 신선식품을 제외한 일본의 3월 인플레이션은 전년 동기 대비 2.6%를 기록하며 일본은행의 목표치인 2%를 초과했다. 당시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현시점의 경제·물가 전망을 전제로 한다면 당분간 완화적 금융환경이 계속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엔저 상황이 개선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한국 경제도 수출 측면에서 교역조건 개선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당장 긍정적 영향을 가져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가격 경쟁력 면에서는 현재보다는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일본과 한국이 서로 집중하는 수출 품목이 달라서 금리 인상 영향은 크게 없지만 국내 기업에 불리한 조건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이라며 “장기적 관점에서 엔화 약세에서 벗어나 원·엔 환율 상승 국면에 진입하면 국내 자동차 업종과 조선 업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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