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 고집하는 정부, 역사와 관계 개선의 딜레마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 ‘제3자 변제’ 추진에 “미래지향적 결단 vs 정상회담과 맞바꾼 사과” 일본 정부 및 기업의 호응 부족, 대일 역사문제 대응 ‘좋지 않은 선례’될 것이라는 비판 일각서는 무조건적인 ‘외교 분쟁’ 지양하고 상호 이익을 위한 논의 필요하다는 주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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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6일 정부는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를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제3자 변제 방식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열흘 만에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졌으며, 두 정상은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고 셔틀 외교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국내에서는 정부의 방침을 두고 팽팽한 의견 대립이 벌어졌다. 교착 상태에 빠진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미래지향적 결단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피고 일본 기업의 참여 및 일본 측의 직접적 사과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정상회담과 사과받을 기회를 교환했다’는 힐난이 엇갈린 것이다.

지난 3월 정부 발표 이후 ‘제3자 변제’와 관련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오가는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정상회담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 “정부 방침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 논란에 다시 한번 불을 당긴 것이다. 일본의 사과 없는 배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회 입법조사처가 18일 ‘강제동원피해자 관련 국회 논의 동향과 향후 과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전범기업의 직접적인 사과와 배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과 ‘대법원판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제2조는 강제동원 피해를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제 동원되어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의 생활을 강요당한 자가 입은 생명·신체·재산 등의 피해”로 정의한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지원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군인, 군무원, 노무자로 동원된 피해자는 연인원 780만4,376명에 달한다.

우리 정부는 1975년, 2007년 2차례에 걸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지원을 실시한 바 있다. 하지만 국무총리 소속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 조사 및 피해 판정 등을 담당했던 지원위원회가 2015년 12월 31일 자로 해산됨에 따라 관련 진상 규명 업무도 사실상 중단됐다. 이에 당시 지원을 신청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 채로 남게 됐다. 뿐만 아니라 특별법의 피해 인정 범위와 보상 및 지원 범위가 달라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도 많다.

한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보상·지원 조치와는 별개로 피해자들은 199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왔으며, 2000년부터는 국내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그 결과 2018년 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 지배 및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 피고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1인당 8천만원에서 1억5,000만원까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홋카이도 개척 토목 공사장의 한국 노동자들/사진=우리역사넷

‘제3자 변제’ 방안에 쏟아지는 우려

2023년 3월 6일 우리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관련 해결방침은 제3자 변제 및 채권 소멸을 골자로 한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8년 3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고, 현재 계류 중인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식이다.

‘제3자 변제’ 해결방침이 발표된 이후 다양한 우려가 제기됐다. △피해자가 정부안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재단의 제3자 변제 효력 여부 △일본 정부 및 가해 기업의 사과, 기부금 참여 등 일본 측의 호응 조치의 유무 △대법원판결금 지급 주체로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적합성 여부 △2018년 대법원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 없는 피해자가 정책 대상에서 배제되는 상황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외교부는 해결방침을 실제로 실행했고 지난 14일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 피해자 10명의 유족에 판결금 지급을 마쳤다. 판결금은 1인당 2억~2억9,000만원으로 알려졌다. 다만,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인 양금덕(94)·김성주(95)·이춘식(99)씨 등 3명과 또 다른 피해자 2명의 유족은 일본 전범 기업이 아닌 한국 정부에 의한 이번 배상금 지급을 거부한 상태다.

이에 일각에서는 정부가 제3자 변제를 통한 ‘채권 소멸’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급급해서는 안 되며, 소송원고단뿐만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전체를 염두에 두고 포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본 측의 호응 조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정부 및 기업의 직접적 사과 및 배·보상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다. 정부의 이번 조치가 향후 정부의 대일 역사문제 대응의 선례이자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사진=코리아넷

‘역사적 피해’와 ‘관계 개선’의 딜레마

한편 관련 문제를 무조건 외교적인 분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가해국의 사과 및 배상 참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상호 이익을 위해서라도 소모적인 분쟁을 이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광복 당시 일본의 상황에 대한 맥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광복 후 일본은 자국민의 피해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히키아게샤(引揚者)의 사례를 살펴보면 당시 일본의 처참했던 상황을 일부분 이해할 수 있다. 히키아게샤는 식민지에 거주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을 일컫는다. 항복한 일본 정부 대신 일본을 통치하던 GHQ는 한반도 남부의 모든 일본인 송환을 명령했고, 극소수의 일본인을 제외한 일본인은 본토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일본으로 들어온 히키아게샤들에게 본토 생활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본토에 마련된 히키아게샤 임시 수용소는 반영구시설로 자리 잡았다. 본토에 거처가 없는 히키아게샤들이 치솟는 물가와 집세를 부담할 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토인들은 민생과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 히키아게샤의 송환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이들은 본토인들의 멸시를 받으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갔다.

어선에 탑승하는 히키아게샤/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당시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고통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그 ‘업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쿄 나리타 공항 인근에서 무리 지어 거주하는 히키아게샤들의 터전 보호를 위해 나리타 공항 확장 공사가 진행되지 못한 것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 정부는 전쟁으로 피해를 본 식민지는커녕 자국민이 겪은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패전 이후 일본 정부가 겪은 고통을 피해국인 우리나라가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다. 경제와 민생이 충분히 회복된 지금에 와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일본의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여전히 헛돌고 있으며, 양국 관계는 수십 년째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무조건적인 분쟁보다 상호 이익을 위한 의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현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존중과 한일관계 개선 사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 대법원판결 이행을 거부하는 일본을 상대로 피해자 구제를 실시하는 것은 분명히 난제다. 하지만 1910년에 이르는 협약과 조약이 ‘이미 무효’이며,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가 불법이라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외교부는 제3자 변제를 거부한 피해자 5명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으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정상회담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 “정부 방침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비판을 샀다. 역사적 피해 보전과 미래의 이익을 두고 의견이 대립하는 가운데, 현 정부는 어떤 선례를 남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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