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복지와 재정 건전성 사이의 ‘간극’, 건보 적자 만성화에 ‘눈치’ 보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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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고 1조5,000억 추가 투입 시사한 정치권, "정부 재정은 어쩌나"
국고 빼면 '적자' 뿐인 건강보홈, 2032년 누적 적자액 '61조' 전망
중국인 건보 문제 '정조준'한 정부, 정작 노인 인구 증가 문제는 '도외시'
지난 1월 건강보험노조와 시민단체 무상의료운동본부가 국회 정문 앞에서 건보 정부지원 항구적 법제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사진=무상의료운동본부

정치권이 만성화된 건강보험 수지 적자를 메꾸는 데 국고 1조5,000억원을 추가 투입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가 국민 부담을 덜겠다며 내년도 건강보험료를 7년 만에 동결하면서 그 대신 국고 지원 예산을 1조4,000억원 늘렸음에도 추가 증액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국회 요구분을 포함하면 내년도 건강보험 국고지원 규모는 총 14조원에 달한다. 이에 일각에선 “지출 통제 없이 무작정 예산 투입만 강행해선 현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가능성이 저해되는 결과만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건보 국고 추가 투입, “적자 규모 늘어날 전망”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14일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를 열고 2024년도 건강보험에 대한 일반회계 국고지원 예산을 정부안 대비 1조5,000억원가량 늘어난 12조1,000억원으로 늘리기로 의결했다. 국민건강증진기금에서 들어가는 국고지원금 1조9,000억원을 포함하면 내년도 국고지원금은 총 14조원 수준으로, 올해 11조원 대비 약 3조원 늘어난다. 복지위는 정부가 짠 예산이 국민건강보험법에 규정된 국고지원액인 14%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증액의 근거로 들었다. 정부안인 10조5,262억원은 내년도 건보료 예상 수입액인 86조4,283억원의 12.2% 수준이다. 이에 정부는 건전재정 원칙에 따라 내년 예산을 올해 예산 대비 2.8% 늘리면서도 건강보험 가입자 지원 예산은 15%나 늘렸다. 여기에 더해 정치권이 부족한 1.8%p에 해당하는 1조5,737억원을 늘려 14%를 채운 셈이다.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지원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 서비스를 국가 차원에서 뒷받침한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건강보험 등 사회 보완책 덕에 우리나라에 ‘의료보험(복지) 좋은 나라’라는 입지가 생겼으니 마냥 틀린 정책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건강보험이 방만한 의료 지출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건강보험 국고지원엔 정부 예산의 2%에 달하는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지만 건강보험 재정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결정하는 작업에 있어 정부와 국회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보건 분야 지출은 의학 전문성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는 이유로 의약업계가 주도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가 건강보험 수입 및 지출을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건정심은 공급자 대표 8명과 가입자 대표 8명, 공익위원 9명 등 총 25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위원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공급자와 의료 혜택을 누리는 가입자 그 누구도 정부의 국고 지원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 사실상 ‘과도한’ 지원이 이뤄진다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

이처럼 현행 건강보험 제도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의료복지 확대 요구와 보상을 확대해 달라는 의료계의 목소리가 지출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이로 인해 건강보험은 국고 지원 없이는 붕괴될 수준의 만성 적자 상태에 빠져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10월 발표한 ’2023~2032년 건강보험 재정전망‘에 따르면 올해 건보 재정수지는 수입(93조3,000억원)이 지출(92조원)을 넘겨 1조3,0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그러나 11조원에 달하는 국고지원금을 제외하고 보험료 수입과 급여 지출만 감안하면 9조7,000억원이 적자다. 앞으로의 전망은 더 어둡다. 예정처에 따르면 건강보험의 지출 증가 흐름이 그대로 이어질 경우 현재 소득의 7.09%인 보험료율이 법적 상한선인 8%까지 오르고, 2027년 이후 국고 지원이 계속되더라도 전체 재정수지는 2024년이면 적자로 전환해 2032년엔 적자 규모가 20조원까지 늘어난다. 2032년 기준 누적 적자액만 61조6,000억원에 달할 것이란 게 예정처의 설명이다.

건강보험 수입, 지출 및 준비금 전망(2023~3032년)/출처=국회예산정책처

‘외국인 건보’ 때리는 정부, 하지만?

건강보험의 재정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은 그간 꾸준히 제기돼 온 바 있다. 지난 2월 기획재정부와 ‘보건분야 예산회의’를 개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보험 지출을 전혀 모니터링할 수 없고 지출 증가율도 결정할 수단이 없는데도 정부가 자동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에 예산을 투입하는 현재 한국의 상황은 매우 특이하다”고 했다. 대다수 OECD 회원국들이 세금이 들어가는 건보의 지출 항목과 증가율 등을 정부와 국회가 통제하는 데 반해 한국은 지출을 통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부 예산이 ‘자동적으로’ 투입된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제2차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 자문 보고서를 작성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역시 최근 공개한 용역 보고서 초안을 통해 지출을 먼저 결정한 뒤 이에 맞게 수입을 정하는 ‘양출제입’ 방식에서 벗어나 수입에 지출을 맞추는 ‘양입제출’ 방식으로 건보 재정관리 체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행 건강보험 제도의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데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의미다.

이에 정부가 먼저 문제 삼은 건 외국인 건강보험이다. 최영희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0월 공개한 ‘2017년 이후 외국인 국적별 건강보험료 부과 대비 급여비 현황’에 따르면 외국인 가입자 수 상위 10개 국가 중 중국만 재정 수지가 적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2018년 중국 국적 건강보험 가입자에게 부과한 보험료는 3,766억원이지만 지급한 급여비는 5,275억원으로 1,509억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이어 ▲2019년 987억원 ▲2020년 239억원 ▲2021년은 109억원 ▲2022년 229억원 등의 재정 적자를 각각 기록했다. 이는 중국인으로부터 받은 보험료 대비 공단에서 지급한 진료비가 더 많아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최 의원은 “국민이 피해를 보는 외국인 건강보험 무임승차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며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1대 과제로 꼽았다.

다만 일각에선 ‘진짜’ 문제는 고령층 증가에 따른 의료비 지출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지율 압박에 부담을 느껴 고령층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국내 정치권의 염증적인 문제가 다시 한번 터져 나온 셈이란 비판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04년 대비 2020년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20~50대 인구는 31.8%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60대 이상 인구는 106.7%나 급증했다. 급격한 고령화로 부양해야 할 노년 인구가 빠르게 늘고 출산율 감소로 생산인구 증가세는 주춤했기 때문이다.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65세 이상 인구가 늘면서 이들이 지출하는 진료비도 크게 증가했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건강보험 적용인구 비율은 2020년 기준 15.4%로 2015년(12.3%) 대비 3.1%p 높아졌고, 이들이 1인당 월평균 진료비는 같은 기간 36.7% 증가했다. 생산연령 인구는 줄어드는데 의료비 비중이 높은 고령층이 계속 늘어나니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물론 고령화 흐름에 따라 노인 복지 정책이 강화돼야 하는 건 사실이나, 이로 인해 국가 재정 전반이 흔들릴 위기에 놓여 있다면 정책 수립 측면에서 재고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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