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링크플레이션 잡아라” 칼 뽑아든 정부, 뚫리지 않는 방패와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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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가격 손보고, 고지 의무화하고" 기업 슈링크플레이션 제재 시작됐다
세계 각국서 슈링크플레이션 견제, 국내 기업 "해외랑 우리나라 다르다"
슈링크플레이션 막으면 스킴플레이션 온다? 악순환 끊어내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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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슈링크플레이션(제품의 가격은 그대로 두고 제품의 용량을 줄여 판매하는 행위)’ 단속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13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고 제품 포장지에 용량 변경 사실 표기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의 ‘슈링크플레이션 근절’에 동참하게 됐다.

문제는 이미 정부의 ‘가격 인상 억제’로 피로감을 느끼는 국내 기업들이 단속에 기꺼이 순응할지다. 업계에서는 가격 인상 억제가 슈링크플레이션으로, 슈링크플레이션 억제가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기업의 수익성과 직결된 슈링크플레이션 흐름을 간단하게 끊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 슈링크플레이션 대응 본격화

슈링크플레이션은 양을 줄인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가격을 직접 인상할 때 발생하는 소비자 반발을 피하고, 몰래 원가를 아껴 수익성을 확보하는 일종의 ‘꼼수’로 통한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 국가 기업에는 용량·함량 변경 사실을 따로 소비자에게 고지할 의무가 없지만, 최근 들어 슈링크플레이션이 소비자 기만행위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각국에서 대응책이 마련되는 추세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본격적인 제재에 착수했다. 우선 용량별로 가격을 표시하는 ‘단위가격 표시제’의 실효성을 강화한다. 현재 단위가격을 표시하고 있는 84개 품목 외에도 즉석조리식품류와 컵라면, 위생용품 등을 표시 대상으로 추가한다. 아울러 단위가격이 상승하는 경우 제품 포장지의 용량 표시 방식을 변경하고, 식품의 제품명으로 사용한 원재료 함량이 변했을 경우 관련 정보를 공개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차후 온라인몰에도 단위가격 표시제를 적용할 예정이다.

이에 더해 정부는 기업이 소비자 대상 고지 없이 용량이나 규격, 성분을 비롯한 중요 사항을 변경할 수 없도록 조치할 예정이다. 주요 생필품의 용량이나 규격, 성분을 변경할 경우 포장지에 직접 표기하거나, 제조사 홈페이지 또는 판매처에 고지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식이다. 고지 없이 용량을 줄이거나 중요 원재료 함량 비율을 낮추는 경우 부당한 소비자 거래 행위로 지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차후 감시 체계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유통업체와 자율협약을 맺어 대형마트·온라인 등에서 유통되는 1만여 개 상품에 대한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하고, 소비자원 모니터링 대상을 현재 주요 생필품 128개 품목(336개 상품)에서 158개 품목(500여 개 상품)으로 확대한다. 아울러 소비자원 안에 가격조사전담팀을 신설, 자율협약 이행점검과 신고센터를 꾸준히 운영해 나갈 예정이다.

슈링크플레이션 때리는 각국, 韓 기업은 억울하다?

앞서 언급했듯 슈링크플레이션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각국 시장에 슈링크플레이션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는 용량 변경이 소비자에게 의무적으로 알려야 할 정보라고 판단, 대응책 마련에 힘을 기울이는 추세다. 일례로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9월 기업들에 제품 용량에 변화를 주는 경우 이 같은 사실을 고지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독일 정부도 제품 용량을 몰래 줄이면서 포장재는 그대로 두는 과대 포장 행위가 ‘소비자 기만’이라고 판단,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검토하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이미 작년부터 제품 용량에 변화가 있을 경우 변경 전후의 용량, 변경 수치와 비율을 6개월 이상 상품 포장에 표시하도록 의무화한 상태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이 같은 ‘슈링크플레이션 제재’ 흐름에 편승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 산업계에서는 해외 사례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재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운데, 정부의 물가 안정 압박으로 가격을 인상하지 못하며 대다수 국내 기업이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발생하는 슈링크플레이션은 사실상 시장에서 가격이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외국의 사례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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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링크플레이션, 손쉽게 없앨 수는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슈링크플레이션을 단속해 기업의 목을 옥죌 경우, 가격 인상을 위한 ‘꼼수’가 오히려 교묘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원가 절감이 절실한 기업이 슈링크플레이션 기회를 잃게 되면 용량을 줄이는 대신 서비스·상품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스킴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스킴플레이션은 ‘인색하게 군다’는 뜻을 지닌 스킴프(skimp)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다. 

스킴플레이션은 단위당 가격 변화를 통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슈링크플레이션보다 한층 복잡한 문제다. 기업이 노동력 절감, 서비스 제공 품질 저하, 원재료 품질 저하 등을 통해 교묘하게 원가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2021년 발생한 디즈니의 ‘테마파크 트램’ 사태가 대표적인 스킴플레이션 사례다. 당시 디즈니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업 복귀 과정에서 주차장과 테마파크 사이를 오가는 트램 서비스를 재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방문객들은 테마파크 입·퇴장을 위해 약 1마일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슈링크플레이션, 스킴플레이션과 같은 ‘꼼수’식 가격 인상은 시장에 반영구적인 변화를 안길 위험이 있다. 새로운 크기나 용량, 품질의 제품이 수익성에 도움이 될 경우, 기업이 해당 상품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가능성이 상당히 낮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슈링크플레이션 현상 자체가 ‘뚫을 수 없는 방패’라는 자조적인 분석마저 흘러나온다. 일차원적인 정부 단속만으로는 기업 수익성과 직결되는 슈링크플레이션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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