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철수 시 세금폭탄”, 러시아 떠난 유럽 기업들 직접적인 손실만 ‘144조원’

러시아 사업장 가진 유럽 기업 600곳 가운데 ‘176개 기업’ 직접적인 자산 손실 사업체 매각에 벌금형에 가까운 세금 부과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글로벌 기업들 일단 공장 멈추고 사태 추이 살피는 국내 기업들 “당장 철수하면 손해 막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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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러-우 전쟁 이후 유럽 기업들이 약 1,000억 유로(약 144조원)이 넘는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정부가 비우호국 출신 기업들의 사업 철수 시 매각 자산의 일부에 세금을 물도록 비밀리에 법을 제정한 가운데 이들 기업이 입은 손실 가운데 대부분은 러시아 사업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한편 현지 진출 국내 기업들은 현지 인력들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공장 가동을 멈추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BP, , 토탈에너지등 에너지 기업들 손실 가장 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유럽 기업 600곳의 연간 사업보고서와 재무제표를 조사한 결과 전체 약 30%인 176개 기업이 러시아 사업 매각, 폐쇄, 축소 등으로 약 1,000억 유로의 직접적인 자산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들의 자산 손상, 외환 관련 비용 지출, 기타 일회성 비용 지출을 합산한 규모로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원자재 비용 급등과 같은 간접적인 여파는 반영되지 않았다.

주요 산업 가운데 특히 에너지 기업들의 손실이 가장 컸다. 대표적으로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과 셸(Shell), 프랑스 토탈에너지 등 석유·가스기업 3곳은 러시아 사업으로 406억 유로(약 58조원)의 손실을 입었다. 일례로 BP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일 만에 러시아 국영회사 로스네프트 지분 19.75%를 매각하면서 255억 유로(약 36조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이 밖에도 유럽 내 유틸리티 기업은 147억 유로(약 21조원), 자동차 제조사 등을 포함한 산업 부문은 136억 유로(약 19조원), 은행·보험사·투자사 등의 금융사는 175억 유로(약 25조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일부 제조업 기반 기업들은 러시아 내 자산들을 헐값에 매각한 후 상각 처리하고 있는 가운데, 대표적으로 프랑스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 르노가 지난해 5월 모스크바 내 공장을 매각한 후 23억 유로(약 3조원)를 상각 처리한 것으로 파악됐다. 유럽 언론 보도에 따르면 폭스바겐, BMW, 페라리 등 11개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가 적립한 대손충당금만 64억 유로(약 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전쟁으로 손실을 입은 기업이 소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J대학 경제학 교수는 “지난해 기준 전 세계에서 러시아의 GDP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1%에 달한다”면서 “그리 크지 않은 러시아 경제 규모와 유럽의 러시아 시장 대외투자 규모가 3.5%에 불과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유럽 기업들이 입은 손실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1,871EU 기업 가운데 ‘50%’는 여전히 러시아 사업 유지

지난해 개전 이후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러시아에 대한 규탄과 함께 기존의 협력 관계를 깨겠다는 발언을 내놨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격분하며 러시아에서 사업을 접겠다고 공표한 기업 중 상당수가 여전히 현지 사업을 유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예일대 최고경영자리더십연구소(CELI) 연구팀이 밝힌 결과에 따르면 개전 이후 ‘러시아 사업 축소’를 공개 선언했던 기업 1,000여 곳 중 일부가 아직 러시아에서 해당 사업을 철수하지 않고 정상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이 사업 철수 정도에 따라 기업들을 ‘A등급(완전 철수)부터 F 등급(평소대로 정상 영업)’까지 5개 등급으로 분류한 가운데, 가장 낮은 F등급에는 226개 기업이 선정됐다.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경제대학이 집계한 자료에서도 러시아에 진출한 1,871개 EU 기업 가운데 50% 이상이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이탈리아 은행 유니크레딧, 오스트리아 은행 라이파이젠, 스위스 네슬레, 영국 유니레버 등이 있다. 다만 이들 기업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내 사업장 등 자산 매각을 발표했음에도 새로운 구매자가 없어 러시아를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가 외국 기업들의 출구전략을 옥죄는 점도 기업들의 철수 흐름이 더딘 이유 중 하나다. 러시아는 지난 3월 ‘비우호국 투자자들이 사업체를 매각할 경우, 시장 가치의 최대 1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외국 기업의 자산 매각 관련 조항을 비밀리에 개정했다. 해당 개정에 따라 비우호국 기업이 현지 자산을 매각할 경우 최소 시장 가격의 절반 넘게 할인된 금액으로 파는 손실과 더불어 추가 세금까지 물게 되면서 기업들의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8월 4일 기준 현재 262개 글로벌 기업이 완전히 러시아 내 사업을 철수한 반면 1,393개 이상의 기업이 사업을 지속 중이다/출처=Leave Russia project

현지 진출한 우리 기업들, 현지 인력으로 구조조정 및 공장 가동 멈춰

유럽 기업들이 손실을 보면서까지 출구전략을 감행하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의 상황은 어떨까? 한국은 러시아의 10위 수출국이자 5위 수입국에 해당하며, 반대로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15위 교역 대상국이다. 우리나라는 러시아에 주로 석유제품·원유·석탄·천연가스 등을 수입하고,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 가전과 소비재 등을 수출한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53곳이다. 이 가운데 일부 기업들은 사업을 철수하고 러시아를 떠났지만, 주요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거치거나 공장 가동을 멈췄으나 아직 철수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앞선 예일대 최고경영자리더십연구소 연구팀 조사에서 대부분 B등급(대부분 사업 일시 중단하며 복귀 가능성을 열어둔 기업)을 받았다. 현대차, 대한항공, LG전자, HMM 등 생산이나 수출을 중단한 국내 기업들이 여기에 포함됐다.

중국 최대 반도체기업 SMIC, 통신장비업체 ZTE, 농업은행 등이 평소대로 사업을 유지 중인 가운데 이들과 유사하게 F등급으로 분류된 국내 기업이 있다. 연구팀은 한국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포스코가 러시아 자회사를 통해 사업을 정상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포스코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포스코는 러시아 사업장들에 대해 구조조정을 진행했고, 현지 직원을 채용함에 따라 사업의 명맥만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러시아에 남은 국내 기업들은 사태 추이를 살피고 있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러시아는 인구가 많고 유럽까지 진출이 용이한 시장이라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면서 “현재는 공장 가동을 멈추고 본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철수 시 기존 공장과 설비 등을 헐값에 넘겨야 해서 큰 손실이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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