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파산 사태’ 이후 나타난 금융산업의 4가지 변화

pabii research
올해 3월 실리콘밸리 최대 은행 SVB 40년 역사 마침표
주가폭락 하루만에 美 역사상 최대 규모 뱅크런 이어져
美 연준·FDIC 예금 보호조치, 72시간의 긴급상황 종료

올 한 해 미국의 벤처투자 시장은 미 연방준비위원회(Fed·연준)의 금리 인상 결정에 따른 유동성 축소, 실물경기 둔화 전망, 금융시장의 불확실성 확대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해 4분기부터 VC(벤처캐피탈) 투자가 위축되면서 올해 3분기 기준 투자 총액이 2년 연속 감소했다. 3,200여 개의 스타트업이 문을 닫았고 270억 달러(약 35조원) 이상 규모의 펀딩이 사라졌다. LP(출자자)들도 자산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투자 수익이 감소했다.

올해 벤처 투자 시장을 이야기할 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꼽자면, 단연 40년 역사의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사태일 것이다. 지난 3월 발생한 SVB의 파산과 뱅크런, 은행권 연쇄 도산에 따른 금융리스크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에 혼란을 가져왔다. 3월 9일 SVB의 주가 폭락과 뱅크런이 가시화되면서 시작된 72시간의 긴급상황은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예금 전액을 보호하기로 결정하면서 비로소 진정됐다.

SVB 사태는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리먼브라더스의 파산과는 달리 금융시장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로 확대되지 않았고 미 금융당국은 은행의 파산이 확산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SVB를 비롯한 일련의 은행 파산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VC와 창업자들의 위험 회피도가 높아졌다.

스타트업 전문은행의 파산으로 자금 조달 어려워져

SVB는 기술 스타트업, 벤처기업 등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금융회사 중 하나로 실리콘밸리의 창업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초기 스타트업의 대형 은행들과 달리 자금 조달과 성장을 돕기 위해 완화된 대출 조건을 적용했고 신용카드, 대출, 예금, 자금 조달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와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는 단순히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을 위해 파티나 컨퍼런스를 후원하는 다른 금융기관과는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스타트업 대상 재무회계 컨설팅기업인 크루즈 컨설팅(Kruze Consulting)의 힐리 존스(Healy Jones) 부사장에 따르면 SVB 파산 이후 실제 VC나 스타트업 시장에서 주택 담보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비단 SVB 사태 때문만은 아니지만 실제로 올해 벤처대출(Venture debt)을 확보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고금리로 인해 벤처대출의 이점이 사라지면서 대출을 받으려는 수요 자체가 줄어들었고 투자 활동도 감소한 영향이다.

US deal value by stage (excluding convertible and bridge)
미국 벤처대출 현황(2023년 2분기 기준), 주: 엔젤·씨드 단계(네이비), 초기 단계(민트), 후기 단계(옐로우), 성장 단계(오렌지)/출처=PitchBook

게다가 SVB 사태로 VC에게 친화적이었던 퍼스트리퍼블릭은행(FRB)까지 상장 폐지되면서 규모가 크지 않는 VC의 경우 대형 은행과의 캐피탈콜을 연결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존스 부사장은 “일부 VC들은 FRB가 상장 폐지되면서 정말 큰 타격을 입었다”며 “기업의 생존이 위협받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사업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라인업을 만들지 않는 이상 대형 은행들과 캐피탈콜이나 신용 거래가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며 “이제 스타트업들은 대형 은행과 거래를 하기 위해 SVB와 FRB의 전성기 때보다 더 많은 절차를 거치게 됐고 실제 기술개발이나 제품 범위가 좁아졌다”고 덧붙였다.

기업 자금 관리·운용 다각화, 위험 회피도까지 증가

실리콘밸리의 창업자와 VC들은 SVB 사태 이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자금 관리·운용의 다각화를 꼽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투자를 이끌었던 톰슨 로이터스 벤처스(Thomson Reuters Ventures)의 타마라 스테펀스(Tamara Steffens) 디렉터는 “SVB 사태 이후 기업들은 은행과 자금 운용에 있어 다양한 전략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실제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JP모건(JP Morgan)의 스타트업 뱅킹을 총괄하는 아샤프 헤벨라(Ashraf Hebela)는 “SVB 사태 당시 많은 스타트업들은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급히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 2개월 분의 임금을 확보하는 것이 안정적인 자금 운용을 위한 표준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0년 전만 해도 초기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은 자금 운용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금 운용과 관련한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자금 운용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대형 은행과 거래하는 스타트업이 늘어났다. SVB 사태 이후 중·소형은행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면서 많은 중·후기 스타트업들은 JP모건과 같은 대형 은행으로 예금을 옮긴 것이다. 일례로 SVB와 거래 계약을 체결했던 미국 녹색철강 스타트업 보스턴 메탈(Boston Metal)은 SVB 파산 이후 자금 운용의 다각화를 중점 추진하면서 대형 은행과의 거래를 확대했다. 이에 대해 보스턴 메탈의 아담 라우어딩크(Adam Rauwerdink) 부사장은 “스타트업의 자금 운용에 있어 SVB 사태 전후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실제 크루즈 컨설팅에 따르면 신생 스타트업의 약 60%가 설립과 동시에 JP모건에 계좌를 개설했고 이외에 다른 대형 은행과 거래하는 스타트업들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SVB 파산이 불러온 반사이익 효과

한편 SVB 사태 당시 뱅크런이 일어난 72시간 동안 당일 이체 서비스를 제공한 핀테크 스타트업들은 큰 성과를 거뒀다. 스타트업 전용 카드를 발급하는 B2B 핀테크 기업 브렉스(Brex)는 SVB 사태 이후 고객사로부터 30억 달러(약 3조9,000억원)를 추가 예치했으며 기업가치도 123억 달러(약 16조)로 뛰어올랐다. 금융기술 기업 머큐리(Mercury)도 SVB 사태 이후 3개월간 25,700명의 신규 고객을 유치했다.

브렉스의 마이클 타넨바움(Michael Tannenbaum)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브렉스는 은행처럼 현금을 직접적으로 관리·운용하는 기업이 아님에도 SVB 사태 이후 체킹 어카운트 서비스(checking account service)의 비중이 10%p 상승했다”며 “한 번에 자금 집행과 관리를 할 수 있는 브렉스의 올인원 시스템은 스타트업들이 자사를 선택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브렉스는 스타트업에 법인카드를 발급하는 동시에 은행처럼 계좌를 운영하는데 스타트업의 재무 담당자들이 자금을 통합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을 선호한다는 설명이다.

브렉스와 머큐리를 선호하는 스타트업도 대폭 증가했다. 미국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AC(액셀러레이터) 기업 와이 콤비네이터(Y Combinator)의 고객사 50%가 머큐리의 계정을 개설했고 이 중 80%가 브렉스의 서비스를 함께 이용하고 있다. 더욱이 FRB 상장 폐지 이후에는 자산 규모가 2,000만 달러(약 260억원) 미만인 마이크로 VC들도 머큐리에 가입해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머큐리의 창업자 이마드 아쿤드(Immad Akhund)도 “SVB 사태로 인해 많은 스타트업들이 머큐리로 옮겨왔으며 이 가운데 95%가 여전히 우리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스타트업이 성장할 경우 대형 은행으로 옮겨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비교적 간단한 은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초기 스타트업에게는 브렉스와 머큐리의 서비스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이들이 성장해 1억 달러(약 1,300억원) 이상의 투자금을 유치하거나 IPO(기업공개)를 추진하기 위해 투자은행과 연계돼야 할 때는 대형 은행과의 거래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HSBC 등 대형 금융사들, 잇따라 SVB 고위직 영입

지난 3월 뱅크런이 시작되자마자 대형 은행들은 SVB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업계에 따르면 SVB 사태 이후 몇 달 동안 HSBC, 스티펄(Stifel), 모엘리스앤컴퍼니(Moelis & Co.), JP모건은 데이비드 사보우(David Sabow), 존 차이나(John China) 등 SVB의 고위직을 영입했다. 특히 사보우를 영입한 HSBC는 SVB의 바이오테크놀로지와 테크뱅킹 부문 임직원 다수를 고용했는데, 이에 SVB의 새로운 주인이 된 퍼스트 시티즌스 뱅크셰어스(FCNCA)는 HSBC가 임직원 수십 명을 동시에 빼가면서 핵심 고객을 비롯한 기밀정보를 훔쳐갔다며 HSBC와 전직 직원을 상태로 10억 달러(약 1조3,000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 HSBC는 FCNCA의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대형 금융회사들이 SVB의 임직원을 영입하는 것은 고객 확보를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창업자들이 기존에 SVB가 제공했던 FCNCA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SVB의 서비스는 스타트업 맞춤형으로 전문성이 있는 데다 여전히 유리한 대출 조건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법무법인 폴리호크(Foley Hoag)의 제니퍼 오데(Jennifer Audeh) 공동의장은 “이미 스타트업의 재무 담당자들이 SVB 담당자와의 관계에서 신뢰와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며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1,500명가량의 SVB 고객들이 새로운 예금을 예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SVB라는 브랜드에 대해 스타트업 친화적이고 전문성이 있다는 인식이 여전하고 파산 사태에 대한 기억은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기업들이 여전히 SVB에 신뢰를 가지고 예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Similar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