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일 관계 정상화 물꼬, 신뢰가치사슬 구축하는 실리외교 자신 있나

美 백악관 입장 표명 “한일 정상 만남과 한미일 3국 협력 강화 지지” 반도체 분야 TVC 구축하는 미국, 보호주의 진영화로 심화되는 미중 패권 경쟁 한일 관계 해빙 무드로 대북정책 공조도 기대돼, 다만 정치적 부담 해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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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6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사진=로이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한일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 관계 정상화 물꼬를 트자 백악관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두 정상의 화해를 향한 걸음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의 동맹에도 중요하다”고 정상회담을 평가하며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각종 후폭풍을 초래하는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일 정상회담이었으나, 중국과 첨예하게 격돌하고 있는 미국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16일 한일 공동 기자회견에서 “오늘 일본은 3개 품목 수출 규제 조치를 해제하고 한국은 WTO 제소를 철회했다”면서 “양국 경제계는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한 바 있다. 또한 “날로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한일 공조가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적극 협력해 나아가자는데 의견을 일치했다”며 “앞으로도 우리 두 정상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필요하면 수시로 만나는 셔틀외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해 나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격돌하는 미·중, 불가피해진 ‘보호주의의 진영화’

세계는 반도체 경쟁에 한창이다. 반도체는 다양한 소재와 복잡한 기술이 필요해 지금까지 국제적 분업을 유지해 온 분야다. 미국은 설계와 장비 분야, 일본은 소재 및 부품 장비, 한국과 타이완은 미세공정(완성품 생산)에 강점이 있어 각 국가가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이른바 글로벌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GVC)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반도체 분야가 최근 미국에 의해 신뢰가치사슬(Trusted Value Chain·TVC)로 재편되는 추세다.

지난해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에서 발간한 ‘21세기 보호주의의 변용, 진영화와 신뢰가치사슬’에 따르면 미국은 서방의 안보와 가치를 위협하는 첨단 기술 분야에 국한해 기존의 글로벌가치사슬에서 중국만 도려내고 아직 기술 우위에 있는 우방과 새로이 신뢰가치사슬 구축에 나서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신뢰가치사슬 구축의 파트너 선별기준으로 ‘가치 공유·유사국·신뢰’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국은 첨단 기술 분야 신뢰가치사슬 구축과 수출통제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 부상을 견제하려 하고 있고, 그 신뢰가치사슬로 떠오른 것 중 하나가 반도체 분야다. 실제로 최근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발표했지만 과도한 독소조항을 포함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미국 내에서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 전 공정을 가능케 하겠다는 취지인데, 과도한 자국 보호주의 조항과 대중 투자 제한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어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 속 전문가들은 이미 ‘미국 대 중국’의 갈등이 ‘미국 진영 대 중국’의 전략 경쟁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보호주의의 진영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김양희 외교안보연구소 경제통상개발연구부장은 “기술 및 데이터의 대중 유출 방지에 어느 한 곳 누수가 없어야 하는 만큼 보호주의의 진영화가 불가피해졌다”고 밝힌 바 있다. 현시대를 신냉전이라 일컬을 수 있지만,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와 다른 점은 현재는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로 국가 간 상호의존성이 고도화되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미·일 반도체 분쟁에서 확인했듯 20세기에는 미국 단독으로도 충분히 보호주의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다극화 시대다. 이로 인해 미국이 뜻 맞는 우방국과 동맹해 집합적으로 반중 공동전선을 펴는 전략을 펴는 것이다. 그만큼 신뢰가치사슬참여국들과의 국제협력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대중의존도·대일의존도 완화 이중고에서 벗어났다는 의견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뉜 지금 한국은 일관성 있고 원칙 있는 대응으로 국제적 고립을 피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미래가 국제협력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제협력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말하고 있다. 일각에선 윤 정부의 외교 방식을 온전히 수렴하긴 힘들지만 이러한 보호주의의 진영화 시대에 한일 관계 개선 자체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는 평도 나온다. 우선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미중 갈등, 한일 갈등, 중일 갈등이 중첩되어 있어 북미 권역이나 유럽과 달리 지역가치사슬(Regional Value Chain)을 구축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대중의존도를 완화하는 것도 버거운 실정이었다. 여기에 대일의존도마저 지속적으로 줄여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아울러 양국은 수출규제로 갈등할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전략적인 관점하에 신뢰가치사슬 내에서 규범 조화와 협력에 나서야 할 우방국이라는 원론적인 개념도 제기됐다. 애초 일본과 협력하지 않으려 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국제정치 구조가 기반에 존재하며, 얼어붙었던 한일 관계가 해빙 수순을 밟는다면 양국이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 더욱 긴요할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신뢰가치사슬 국가로의 합류는 외교적 합리성에 기반한 선택지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은 반도체 분야에서 자국 내 TSMC 연구소와 공장을 유치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고 미국과 긴밀한 관계 또한 유지해오고 있다.

한편 한국은 그간 한반도 안정과 북핵 및 미중 갈등 문제를 단독으로 해결하지 못해 외교적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이었는데, 북핵 문제 해결은 미국과 중국의 협력뿐 아니라 한미일 협력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핵 사정거리에 포함시킬 경우 미국과 한일 양국 간의 안보 분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동아시아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의 글로벌 인태전략 : 공생과 번영의 지역 질서 5’에 따르면 현재 일본은 7개 후방기지를 기반으로 한국의 급변사태에 대한 간접 지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이 일본에 대한 핵 공격 위협을 가할 때 주일미군의 한국 전개는 위협받을 수 있고 한국은 고립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방어를 위해 한일 간의 안보협력 및 급변사태에 대한 상시적인 논의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나아가 일본이 한국을 배제시키고 북한 제재를 안건으로 중국과 일대일 협상 또는 회담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일 간 긴밀한 외교 공조를 통해 양국의 대북정책이 원활하게 전개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외교적 고립에선 벗어났지만 정치적 부담 안은 정부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이 백악관에서 브리핑하는 모습/사진=로이터

이러한 상황에서 여전히 탄도 미사일 발사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국면에서 자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한껏 부각시키고 있다. 이동률 동덕여대 교수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사회주의 연대를 주장하며 중국에 공세 하는 중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심화되고 북미, 남북 간 대화는 중단됐는데 북중 관계는 외형상 더 가까워지고 있다.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은 “최근 미국이 중국의 불가분리의 영토인 대만의 독립을 부추기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미국을 향해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이 중국 편에 가까이 서서 전략적 연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이유는 유엔의 대북 제재로 인한 경제난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중국의 협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의 합리적 우려를 균형 있게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북한의 탄도 미사일 발사에 대한 추가 제재에 반대하고 있다.

이제는 전 정권과는 다른 상황이다.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한 자세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국만 홀로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 결국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국제정치 역학 관계상 일본과의 협력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한일 정상회담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악화일로를 걸었던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던 의지는 좋았으나 의욕만 앞섰다는 평이 우세하다. 대다수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을 강행한 만큼 윤 정부는 큰 정치적 부담을 지고 가게 됐다. 뒤숭숭한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실리를 상대국으로부터 취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국제정치 흐름상 일본을 넘어 중국, 북한,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 미국까지 산적해 있는 외교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지가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백악관은 16일(현지시간) 존 커비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을 통해 한일 정상회담 지지 입장을 표명하며 한미일 3국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커비 조정관은 “12년 만에 열린 한일 정상 만남과 두 나라 관계 발전을 지지한다”며 한미일 3국 협력 강화를 약속하고 북한 위협으로부터 한국과 일본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방위 약속이 철통같다는 것을 거듭 확언했다. 과연 윤 정부가 앞으로 어떤 승부수를 띄울지, 국민들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국제정치 관계 안에서 한국의 위치를 어디에 자리매김하게 할지가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지금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4월에 있을 방미 일정이다. 이번에는 확실히 지렛대(레버리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비행기에 올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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