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치적 압박에 백기, 은행권 ‘횡재세’ 부과 기준 낮춘 이탈리아 정부

이탈리아 금융당국, 일전 조건 만족한 은행 대상 ‘횡재세’ 면제 유가 급등 및 고금리 기조로 올 초부터 불붙은 횡재세 논의 “자원 재분배”일까 “특정 산업에 대한 징벌적 수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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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사진=GettyImages

지난달 고율의 ‘횡재세(windfall tax)’ 부과로 은행권 옥죄기에 나섰던 이탈리아 정부가 결국 꼬리를 내리는 선택을 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은행의 경우 횡재세 부과 대상에서 면제해 주는 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다.

러-우 전쟁 및 고금리 기조로 정유·금융 업계가 여타 산업 대비 과도한 이익을 본다는 지적이 빗발치자, 올해 초부터 횡재세 도입에 대한 주장은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또한 이탈리아의 횡재세 도입으로 인해 최근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관련 논의가 재점화된 바 있다.

이탈리아 정부, 횡재세 조건 완화

25일(현지 시각)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는 지급준비금을 세금 부담액의 2.5배 규모로 늘려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높인 은행은 횡재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항이 포함된 개정안을 발표했다. 또한 개정안은 횡재세 부담액의 상한을 기존 은행 총자산의 0.1%가 아닌, 위험가중자산(RWA)의 0.26%로 조정했다. 부과 기준은 2021~2023년 순이자수익(NIM) 증가분 중 10% 초과액으로 계산된 은행의 초과 수익에 해당한다. 개정안은 이번 주 의회를 승인을 받아 본격적으로 다음 주부터 구속력을 갖게 될 예정이다.

횡재세란 기업 자체의 경쟁력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인해 거둔 추가이익에 부과하는 세금을 의미한다. 지난달 이탈리아 금융 당국은 대출기관이 달성한 초과 이익의 40%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횡재세 법안을 도입키로 한 바 있다. 강도 높은 고금리 여건 속에서 자국 은행권이 대출 이자는 올리는 반면 예금 금리는 낮은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과하게 예대마진을 취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 투자 은행 씨티그룹은 이탈리아 투자 은행들이 해당 세금을 통해 한 해 순익의 19%가량을 세금으로 납부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또한 횡재세 도입 소식 당일(현지 시각 8월 8일)엔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에서 BPER방카의 주가가 11% 급락하고, 반코 BPM의 주가도 10% 가까이 떨어졌다. 이탈리아 최대 은행인 인테사 산파올로의 주가도 8.5% 내렸다.

올해 초부터 바람 붙은 횡재세 논란

사실 이같은 횡재세 논의는 올해 초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러-우 전쟁으로 인해 유가가 비정상적으로 급등하면서 글로벌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대부분 역대 최대 기록적인 수익을 올리자, 과세를 통해 극단적인 시장 변동을 조절하고 자본주의의 건강성을 유지하자는 주장이 유럽 지역 정부들을 필두로 커지게 된 것이다.

실제 영국은 지난해부터 이미 전력 기업에 45%의 횡재세를 부과한 데 이어 지난 1월엔 석유와 가스 기업의 법인세율도 25%에서 35%로 끌어올렸다. 유럽연합(EU)도 화석연료 기업에 ‘연대기여금’을 부과키로 결정했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전력생산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지난 4년간 평균보다 20%를 넘게 늘어난 이익을 초과이윤으로 간주, 초과이윤에 대해 최소 33%의 세율을 부과하는 게 연대기여금 제도의 주 골자다.

한국 또한 올해 1월 ‘난방비 폭탄’ 논란이 터져 나오면서 횡재세 개념이 본격적으로 언급됐다. 특히 지난해 유가 급등으로 조 단위 수익을 낸 정유업계 직원들이 1,000%에 달하는 성과급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정유업계에 횡재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두 차례에 걸쳐 횡재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고, 지난해와 달리 올해 1분기 정유업계 실적이 60% 이상 떨어지면서 해당 논의도 점차 잠잠해졌다.

그러던 중 지난달 이탈리아 정부가 횡재세 법안을 본격 도입하면서 관련 논의가 최근 우리나라도 재점화된 모습이다. 지난달 16일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최근 이탈리아 은행에 ‘횡재세’를 부과한다는 기사가 있었다”며 “경제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은행산업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했음에도 시장 금리가 크게 높아지면서 상반기 우리 금융권이 역대 가장 높은 이자수익을 달성하자, 김주현 위원장이 이탈리아 횡재세를 한국에도 적용해야 할 수도 있다는 식의 레토릭을 던지면서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실제 올해 상반기 5대 은행(신한·KB국민·우리·하나·NH농협)이 거둔 이자수익만 20조4,90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0% 가까이 늘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 치웠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사진=잉글랜드은행

세수 부족 충당을 위한 수단? 또는 자본주의 건강성 유지를 위한 필수적 조치?

다만 유럽의 횡재세 확산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리고 있다. 우선 횡재세 찬성론자들은 전력·식량 등의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국민 다수가 생활고를 겪는 현 상황에서 횡재세는 꼭 필요한 조치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나아가 일반적인 증세보다도 합리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코로나19와 러-우 전쟁 등으로 정부 지출 수요가 증가한 가운데, 업종 간 실적이 크게 갈린 상황에서 세금을 전반적으로 올리는 것보다는 횡재세 징수를 통해 취약한 산업에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설명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해당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분위기다. 샤픽 헤버스 IMF 재정 담당 부국장은 “일회성 세금보다, 영구적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반대 측에선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이로 인한 경기침체로 유럽 경제가 어려워지자, 살림살이가 빠듯해진 국민의 분노 여론을 각국 정부가 횡재세로 잠재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정부가 횡재세와 같은 우발적인 세금 정책에 의존하는 건 암묵적으로 본인들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도 기업의 미래 영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대형 회계법인 KPMG 글로벌 조세 정책부 소속 그랜트 워델 존슨은 “횡재세는 금리 상승과 정부 지출 증가로 부족해진 세수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라며 “산업 전반에 이를 적용한다면 경제적 피해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이번 이탈리아 정부가 횡재세 부과 기준을 완화한 것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해당 사건 뒷단에서 자국 내 횡재세 반대 측이 당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압박을 가했다고 보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달 횡재세를 도입한 이탈리아 행보를 두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럽의 경기 침체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며 횡재세 도입을 재고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또한 조르자 멜로니가 이끌고 있는 연립정부도 균열이 가면서 횡재세 완화에 일조했다. 고(故)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의 장녀 마리아가 “은행권에 대한 ‘추가 이익’이라는 단어는 선동적이며 오해 소지가 있다”며 공개적인 비판 발언을 내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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