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윳돈·소비 줄고 대출만 늘어난다? 대한민국 가계 경제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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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ii research
가계 순자금 운용액 50조원 감소, 팬데믹 당시 쌓인 자금 빠져나가
미국·중국 등 주요국에서는 '이유 있는' 저축 감소 현상 관측돼
해소 없이 쌓이기만 하는 가계 경제 리스크, 소비·가계부채 '빨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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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가계의 여윳돈이 지난 2019년 이후 최소 수준까지 감소했다. 대내외적 악재로 가계 수입 전반이 불안정해진 가운데, 고금리 장기화로 대출 이자 부담마저 가중되며 저축금 지출이 급증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사한 시기 저축금이 감소한 여타 주요국이 개인 소비 증가·가계대출 잔액 감소 등 긍정적 효과를 창출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가계대출 증가·가계 소비 위축 등 각종 리스크 요인이 쌓여만 가는 양상이다.

미끄러진 가계 순자금 운용액

한국은행이 4일 공개한 자금순환 통계에 따르면 가계(개인사업자 포함) 및 비영리단체의 지난해 순자금 운용액(자금 운용액에서 자금 조달액을 뺀 값)은 158조2,000억원(약 1,170억 달러)으로 집계됐다. 2019년 92조5,000억원(약 685억 달러)을 시작으로 △2020년 206조6,000억원 △2021년 167조8,000억원 △2022년 209조원 등으로 꾸준히 증가하던 순자금 운용액이 3년 만에 하락 전환한 것이다. 가계 여윳돈 감소의 원인으로는 경기 침체로 인한 가계 소득 위축과 고금리 기조로 인한 이자 비용 증가 등이 지목된다.

가계의 전체 자금 운용 규모는 194조7,000억원으로 전년(283조5,000억원) 대비 약 88조8,000억원 줄어든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가계의 국내 지분 증권 및 투자 펀드는 전년 31조7,000억원에서 -4조9,000억원까지 미끄러졌다. 이는 2013년(-7조원) 이후 최저 수준이다. 자금 운용액이 음수일 경우, 금융자산 처분액이 취득액보다 많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경기 침체·고금리 기조 속 가계가 위험 자산 비중을 줄이며 절대적인 거래 금액이 감소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가계 자금 조달액은 총 36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한은 통계 편제가 시작된 2009년 이후 최소 규모자, 전년(74조5,000억원) 대비 38조1,000억원 적은 수준이다. 단, 같은 기간 주택담보대출 규모는 2배 가까이 증가하며 증가세를 유지했다. 이와 관련해 한은 측은 “주택담보대출이 꾸준히 증가했지만, 신용대출이 감소세를 지속했고 개인사업자 대출 증가세도 크게 둔화했다”고 설명했다.

미국·중국의 저축 감소 기조

가계 저축의 감소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 가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30% 이상의 엄청난 저축률을 기록했지만, 2021년 초를 끝으로 정부의 재정 지원이 마무리되면서 저축률 역시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렸다. 다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저축률이 하락하고 있음에도 불구, 개인 소비와 소득 모두 꾸준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저축률 하락의 원인이 소득 감소가 아닌 소비 증가에 있다는 의미다. 

미국 소비 증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고용 전망의 개선이 꼽힌다. 2일(현지 시각) 미 노동부가 공개한 구인·이직보고서(JOLTS)에 따르면, 2월 구인 건수는 876만 건으로 전월(875만 건) 대비 소폭 증가했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집계한 시장 전망치와도 부합하는 안정적인 수치다. 이처럼 노동 시장 여건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경우 미래 소득 전망이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가계의 소비 역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자산의 가치가 증대될 때 소비가 함께 늘어나는 부의 효과(Wealth Effect) 역시 미국의 소비 호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중개 사이트 레드핀(Redfin)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평균적인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연간 11만3,520달러(약 1억5,300만원)를 벌어야 한다. 이는 일반 가구의 연간 소득(8만4,072달러) 대비 35%가량 높다. 이처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부의 효과에 따라 소비 심리 역시 팽창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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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저축 감소세는 중국에서도 관측됐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7월 중국의 위안화 예금은 전년 대비 1조1,200억 위안(약 209조원) 감소했다. 이 중 가계 저축액 감소분은 8,093억 위안(약 152조원)에 달했다. 중국 가계의 경우 인출한 예금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부동산 경기에 대한 불안감이 대출 조기 상환 수요로 이어진 결과다. 실제 같은 기간 인민은행은 지난달 신규 가계대출이 전월 대비 2,007억 위안 감소했다고 밝혔다.

순자금 운용액만 줄어드는 한국

이들 국가의 저축 감소에는 뚜렷한 ‘결과’가 있다. 미국은 저축 감소 후 소비 확대를 발판 삼아 경기 전반에 활력을 되찾고 있으며, 중국은 저축률과 가계부채 부담이 함께 감소했다. 반면 한국의 경우 가계부채가 줄어들지도, 소비가 줄어들지도 않은 채 순자금 운용액만이 감소하는 추세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1%로, 4년 연속 전 세계 선진·신흥시장 34개국 중 1위를 기록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가계부채 중에서도 ‘가계대출액’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가계부채는 가계대출액, 신용카드 사용액, 가계 외 소규모 개인사업자 부채 등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계대출 잔액 증가분은 18조4,000억원에 달한다. 정부의 정책 금융발(發) 가계대출 급증이 잔액 증가세를 견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지난해 주택도시기금과 한국주택금융공사가 공급한 주택담보대출 증가폭은 자그마치 28조8,000억원에 달했다.

가계 소비 역시 좀처럼 회복의 조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투자자문 신용평가기관 무디스(moody’s)는 지난달 ‘한국 소비자 동향 보고서: 2024년 3월’을 발간, 향후 6개월간 한국의 소비지출이 다소 부진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소비 심리는 안정화할 가능성이 크지만, 고금리와 부동산 침체가 소비 회복을 제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계 자산 구조가 개선되고 있으나, 부채 상환 능력이 취약한 저소득층 위주로 리스크가 이어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즉 우리나라는 이어지는 경기 침체 기조 속 소비 위축·가계부채 증가·저축 감소의 ‘삼중고’를 떠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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