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문항 논란이 어이가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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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ii research

자주 듣는 표현 중에

그거 대기업 취직하는데 도움 되나요?

라는 표현이 있다.

처음에는 너무 생뚱맞는 질문이라 당황했었는데, 요즘은 그 분들이 수능 쪽집게 강사 수업을 찾아가는 분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는 것도 알게됐고, 수능 만점으로 대학 입시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라, ‘커트라인’에 맞춰서 ‘문 닫고’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분들, 즉 ‘남들이 보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저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아마 본인 ‘스펙’으로는 대기업을 들어가기 힘든 상태니까, 어떻게 뭔가 좀 다른 걸 하고나면 대기업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걸하면 대기업 들어가는데 도움이 될까는 생각, 말을 바꾸면 ‘나를 높여주는 선택’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현한 것이다.

남의 눈치를 매우 열심히 보는 아시아형 인간들에서 자주 보이는 특성인데, 인도 애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자주봤다. 한번은 어느 영어권 게시판에서 타블로(Tableau)와 R의 ggplot2, plotly 중 어떤 편이 더 ‘데이터 시각화(Visualization)’ 전문가가 되는데 필요한 지식이냐(라고 쓰고 어느 쪽이 돈을 더 받느냐)는 질문을 봤는데, 전형적인 인도계 애들의 질문이다 싶었고, 예상대로 답변은 매우 건조하게 타블로 프로그램은 SQL만 알면 나머지는 상식선에서 할 수 있고, ggplot2와 plotly는 단순한 코딩 지식을 넘어서 표현해야하는 그래프들의 밑바닥에 있는 데이터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는 댓글들이 달려있더라. 실제로 기업가면 R 코드 돌리는 곳들은 흔치 않고, 대부분 타블로 같은 솔루션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댓글도 있었는데, 결국 질문 했던 사람이 잘 모르겠지만 일단 R의 ggplot2와 plotly를 해야될 것 같다는 답변이 달린 걸 봤었다.

출처=AZ Quotes

과시형 인재 vs. 성장형 인재

예전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채용을 하고, 상품을 팔면서, 저렇게 과시형 인재, 남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을 하는 인재들이 바로 사기치는 사업의 타겟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항상 말하는대로

남을 속이려 들면 자기가 속는다

는 속설이 여기에도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가 엄청나게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지만, 정작 그 자랑을 위해 필요한 어려움은 전혀 겪고 싶지 않고, 그냥 누군가 나한테 껍데기만 씌워주기를 원하는 사람들, 편하고 쉬운 것만 찾는 사람들에게 ‘이것만 하면 다 됩니다’라는 표현으로 광고하는 것이다.

우리 SIAI에 왔던 모 수도권 대학 박사 학위자 학생 한 명은 Slow Campus(주: 이름 변경)의 홍보 문구 중 하나인 ‘1달 만에 데이터 사이언스 전문가 되기’라는 표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서 찾아갔다가 첫 날부터 후회하고 환불을 요구했다가 환불이 안 되어서 결국 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경험담을 토로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같은 Time series인데 아예 가르치는 내용이 다른게, 거기는 그냥 통계학 교과서 따라서 설명만 하고, 여기는 이거 어떻게 쓰고, 무슨 문제가 생겨서 어떻게 해결하고… 같은 게 계속 실타래처럼 나오잖아요. 거기선 배우는게 없어서 화가 났고, 여기선 제가 너무 못하니까 화가 나요

이 분은 본질적으로 과시형보다 자기 성장형 인재였기 때문에 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려다보니 날 찾아왔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그런 성장형 인재에게도 과시형 인재에게 먹히는 홍보 문구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치품 vs. 필수품 vs. 생필품

상품을 구매하는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데 ‘사치품’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걸 들고 있으면 내가 좀 더 높은 등급의 사람이 된 것 같고, 다른 사람을 낮춰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상품들, 가격이 높다보니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상품이라 가격 정책 하나만으로 소비자 군이 결정되는 상품들을 말한다.

국내에서 대기업 취직이라는게 일종의 사치품이 되어 있는게 아닌가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눈에는 ‘X성 다닌다’, ‘LX 다닌다’ 같은 표현이 뭐랄까, ‘저는 쩌리라서 거기 밖에 못 갔습니다’로 들리는데 (진심이다), 그런 기업들 취직이 사실상 불가능한 계층에 계시는 분들께는 그게 자랑처럼 들리고, 너무 갈망하는 직장이 되는 것이다.

강남 대치동 일대의 학원들이 파는 고가의 강의도 같은 측면에서 사치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두뇌의 역량, 용량, 공부하는 끈기 등등의 모든 측면에서 초명문대를 갈 수 있는 능력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 아이에게 그런 도전을 할 수 있다고 유혹하고, 실제로 일부는 그 성과를 보기 때문이다. S대 재학 시절 내내 속칭 ‘강남 애들’ 중에 두뇌가 기발하게 돌아가고 사고의 깊이가 깊은 경우들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반면, 지방에서 거의 독학한 것 같은 애들이 영어 실력처럼 집안의 돈으로 해결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독보적인 경우들을 압도적인 비율차이로 자주 봤었다. 내가 본 예시의 범위가 전 국민 단위기 아니니 함부로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그런 경험 탓에 ‘쪽집게’ 교육으로 살아남은 애들한테 내가 갖고 있는 기대치는 매우 낮은 편이다.

지방 출신의 학생들은 수능 시험의 어느 한 문제를 풀기 위해 기초 실력을 탄탄하게 다지는 ‘필수품’ 생산에 몰두하는 공장을 돌렸다면, 서울 대치동의 학생들은 그 문제를 좀 더 쉽고 편하게 풀 수 있도록 ‘사치품’ 소비에 비용을 지불했고, 아예 명문대 진학 자체를 포기했던 학생들은 적당히 시험치고 적당히 대학가자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생필품’ 구매 관점에서 입시를 바라보는 셈이다.

사치품과 과시형 인재와 킬러 문항

킬러 문항들이 고교 수준으로는 풀기 불가능하다는 설명도 들은 적이 있고, 모 국회의원은 ‘박사들도 못 푼다고 하더라’는 표현을 당내 회의에서 언급하기도 했었다.

난 역대급 불수능 표현이 나왔던 2002년 수능을 친 세대인데, 그 해 수학, 영어 만점은 문과에 전국 4명 밖에 없다. 그 중 한 명이 나였는데, 나도 그날 따라 수학 시험 시간에 왜 이렇게 어렵냐는 생각을 계속 했었다. 30문제 80점 만점이었던 시절이었는데, 보통 2점짜리 1번~4번은 시험 대기 중에 눈으로 다 풀고, 시험지 확인하라는 감독관 지시에 종이 넘기면서 많으면 5~6문제를 풀 수 있었는데, 2점 짜리도 눈으로 풀다가 당황했었고, 종이를 넘겨 5번을 보자마자 부담감이 확 밀려왔었다. 그나마 수학경시대회 나갔던 때 수학 문제들 때문에 그렇게 부담감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였지, 아마 쉬운 문제들만 풀다가 그 시험을 겪었으면 나 역시 80점 만점을 받기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시험 후에 친구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나처럼 어려운 문제를 꾸준히 풀면서 자신의 한계치를 테스트 했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대박’이 나서 원하던 대학을 찾아갔고, 반대로 쉬운 방법만 찾아다니던 친구들은 그 다음해에 재수 학원에 몰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직전 연도인 2001년에 전국에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오는 ‘물수능’ 이었던 탓에 비슷한 문제 경향이 계속된다면 적당히 쉽게 대학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오판이었다.

킬러 문항으로 가득한 시험지 덕분에 수능 시험을 ‘사치품’으로 생각했던 인재를 대학들이 쉽게 걸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킬러 문항을 없애는게 아니라 학원 교육으로도 킬러 문항에 손을 못 대도록 만들어야 교육 정상화

우리나라는 교육을 ‘평등’의 관점에서 바라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나라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회의 평등’은 제대로 안 갖춰주는데 ‘결과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교육 정책을 책정하는 것이 문제다. 서울 강남 애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서 왜 학원 교육이 불필요한 수준까지 시험 문제의 난이도를 올려버리지 않을까? 되려 왜 난이도를 낮추자는 논의가 나올까?

이미 수능 시험 문제 자체가 변별력이 사라지면서 대학들은 입시에서 수능 의존도를 크게 낮춘 상태다. SIAI에 학부 과정을 만들고 한국인 신입생을 받으려면 어떤 문제들로 입학 시험을 치뤄야 할까는 생각으로 시중에 나온 문제들을 봤더니, 대학들이 수학 시험 하나로만 뽑는 전형 문제 정도나 되어야 내가 뽑고 싶은 학생을 뽑을 수 있겠더라.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어차피 수학 못 한다는 소리겠지, 다 필요 없고, 코테(코딩테스트)만 통과하면 된다’는 수준의 인력들과, 그런 인력들이 만든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다. 코딩테스트처럼 고졸 수준의 지적 역량으로 충분한 도전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대학 교육은 의대, 치대, 로스쿨 같은 이른바 ‘라이선스’ 제공처 이상의 필요도를 갖춘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알짜 인재들만 걸러내는 시스템이 이미 ‘대학 교육은 불필요’라는 사고 방식으로 사람들 머리 속에 잡히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원인을 놓고보면 학생만 많이 받고, 졸업장만 찍어줘서 돈 벌이에 쓰려는 대학과, 그렇게 전 국민이 대학을 가야된다는 압박을 받도록 ‘결과의 평등’을 조장한 교육부의 잘못된 선택이 나라 전체의 Human capital을 몰락시켜놨다.

물론 더 밑에는 표 몰이에 안간힘을 다 쓰는 정치인들이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로 국민 평균의 눈높이에서 한 표를 더 받고 있는 사회 구조가 깔려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출처=SIAI 학생 논문수업 발표자료 발췌

과시형 인재가 사라지고 성장형 인재가 많아져야 Human capital이 성장한다

굳이 중상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갖고 오지 않는다고 해도, 한 국가가 성장하려면 생산품을 해외 시장에 비싼 가격에 팔아 부를 축적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상식선에서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시형 인재만 많아지면 ‘1달 만에~’ 라는 홍보 문구만 시장에 돌아다니고, 유혹에 못 이겼다가 후회하는 사람들만 반복 양산되는 시장이 형성된다. 우리나라가 ‘전세 사기‘, ‘IPO 사기‘ 같은 ‘(인구대비) 사기 1위’라는 불명예를 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교육은 과시형 인재를 길러내도록 구조화 되어 있고, 그렇게 길러진 인재들이 정부 기관, 기업체, 그 외 각종 기관에서 과시형 선택들을 반복 재생산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해외에서 잘 되는 시스템을 갖고 와도 ‘헬조선식 열화‘가 되어 버린다.

처음 SIAI 만들었을 때 가깝게 지내는 친구 하나가

드디어 너도 세상을 깨쳤구나. 스위스 학위 팔아먹는거지? 너도 욕 하더니 사기꾼 다 됐다

라며 놀린 적이 있다.

학생 숫자에 목숨걸고 교육을 포기한 대학교들이 아니라, 최고의 학생들을 더 학대해서 학교 랭킹을 더 높이려고 땀을 쏟는 글로벌 최상위권 대학들과 동급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걸 보면서

너처럼 열심히 살려는 애들 없어 임마. 세상 사람들은 한 풀 벗겨보면 다 양아치야

라던데,

별 생각없이 왔더니 회사 대표가 대박임. 그냥 우리 학교 출신 선배 이런 수준이 아니고, 직접 코딩도 막 하고, 연구도 막 하고, 일 처리 속도도 엄청 빠르고, 그냥 대표 쪽쪽 빨아먹으면 되겠음

이런 표현을 쓰는 인력들만 뽑히는게 현실이지 않나 싶다. 그 카톡을 보지 않은 눈을 사고 싶다ㅋ

우리 SIAI 학생들이 매 달 논문 지도 수업에 와서는 기업체들에서 AI/Data Science 프로젝트들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조금씩 뜯어고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며 저런 애들 뽑아서 돌리는 기업들 몇 군데 빼고나면 결국엔 정부 R&D 지원금 마르는 내년부터 대부분의 회사들이 AI/Data Science 관련 프로젝트들을 대부분 축소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돈 안 들어오는데 성과까지 없는 회사들은 팀을 해체시키는 수순을 밟을 것이고, 뭔가 제대로 결과물이 나오면 남들보다 한 발 더 나간 기업이 되겠지.

기존 회사 내 연구 상태를 ‘Bullshit’이라는 표현을 쓰며 논문 발표자료를 만들어 온 저 학생은 회사에서 얼마나 답답한 상황일까? 그런 인력 투성이인 회사가 된 이유는 기업이 인재 채용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킬러 문항이라며 논란이나 일어나는 ‘결과적 평등’ 위주의 사고가 한국 사회 전체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Bullshit’이나 만드는 애들이 애당초 대학도 졸업 못 했으면 기업들이 AI/Data Science 팀에 배정해줬을까? 아니면 고졸들도 할 수 있는 업무에 그 인력을 배정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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