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뽑] 에필로그 – 조금만 더 일찍 내보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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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ii research
개발자만 안 뽑았더라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아꼈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들을 보낸 덕분에
항상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채용보다 직접 처리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됨
급여 받을 자격이 있는 인력이 많지 않다는 것, 인력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것이 얼마나 사업의 핵심인지 인지하게 된 것이 그나마 남은 것

작년 초까지 약 5년간 한번에 적게는 3명, 많게는 10명이 넘는 개발팀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개발자들, 나아가서는 기술직군, 더 넓게는 한국 시스템에서 교육받은 인력들의 사고 방식 및 역량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5년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내린 결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업 초기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 받았던 내용이다. 당시 개발자를 뽑지 말고, 쉬운 솔루션을 이용해서 내가 직접 회사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라는 추천을 여러 차례 받았었다. 비개발자지만 석·박 과정을 거치며 ‘과학적 프로그래밍(Scientific Programing)‘을 했던 덕분에 코드 치는 것이 겁나지 않는만큼, 회사가 커지기 전까지는 개발자가 필요없을 것이라던 그들이 옳았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그간 버린 시간과 막대한 인건비를 생각하면 감정 조절이 쉽지 않지만, 그들을 뽑는 결정을 내린 것은 나 자신이었다. 분노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향하게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것이라는 농담 같은 격언이 계속 눈에 밟히는 탓에 더 늦기 전에 사업을 접을까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시스템을 만들면서 그런 아쉬움의 감정은 더더욱 깊어졌다. ‘조금만 더 일찍 내가 운전대를 잡고 직접 개발을 진행했었더라면 지금쯤은 우리 회사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텐데’라는 후회를 떨치기 어렵더라.

개발자-안-뽑음_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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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일찍 빠져나왔더라면

웹사이트 접속에 10초씩이나 걸리는 느린 시스템을 완전히 다 갈아엎고,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고 있는 여러 서비스, 기능들을 하나씩 붙이면서, 우리 회사 사정에 맞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 우리 회사의 강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고민들도 함께 커졌다.

지난해 10월에 시작한 서버 셋팅, 11월 중순까지 진행됐던 웹서비스 1차 개편과 구글검색최적화(SEO), 12월 초까지 진행했던 번역기 작업, 12월 말까지 진행한 번역 결과물의 구글SEO 덕분인지 올해 1월 들어 우리 회사의 주요 콘텐츠를 담은 파비리서치OTT랭킹에 각각 월간 40만 명, 60만 명의 방문자가 들어왔다. 한국 방문자는 전체의 1/5 남짓이고, 대부분은 번역된 기사를 구글 검색으로 찾아온 해외 방문자들이다.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방문자 증가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맞다면, 몇 달 안에 합계 100만 명이 아니라 1개 사이트 단독으로 100만 명의 방문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웹사이트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섣부른 추측은 언제나 금물이다.

한 때는 오직 방문자만 많으면 된다는 생각에 콘텐츠 역량의 중요성을 외면한 적도 있고, 그렇게 방문자 숫자에만 집착하며 월 100만 명 방문자 웹사이트를 노리다가 ‘저품질’로 낙인찍혀 웹사이트를 버려야 했던 적도 있다.

이제는 한국의 어지간한 언론사 관계자들이 기사 한 줄을 읽자마자

이렇게 연구원들이 기고하는 글 위주로 운영하면 언론사가 아니라 연구 보고서….

라는 표현을 쓰게 될만큼 콘텐츠의 수준을 끌어올렸는데, 학부생 아르바이트들을 교육시켜서 나온 글이라는 걸 알면 어떤 생각들을 하실까? 나름 교육을 받은 분들, 문장력을 갖춘 분들이 진입하는 언론계 경력직들이 우리 콘텐츠를 그렇게 평가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우리보다 더 고급 콘텐츠를 갖춘 기관은 그 분들 말대로 연구 보고서를 내놓는 곳들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칭찬에 기분이 좋은 것만도 아니었던 것이, 한국처럼 분석 콘텐츠를 읽고 소비하는 인구의 비중이 매우 낮은 나라에서 과연 방문자를 모을 수나 있을까는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 번역기, 번역SEO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분석력을 갖춘 고급 사용자를 끌어올 수 있게 됐다.

하루 빨리 웹사이트가 무럭무럭 커졌으면 좋겠는데, 욕심이 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6개월이라도 먼저, 가능하면 1년 쯤 전부터 리뉴얼을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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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핵심이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니라 콘텐츠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더라면

앞으로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공개된 우리회사의 웹사이트는 기껏해야 좀 무거운 블로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번역기, 구글SEO 관련 각종 기능 뿐만 아니라, 챗GPT와 유사한 LLM 연동을 통해 OTT 콘텐츠에 대한 답변을 바로바로 내놓는 서비스, 금융투자와 관련해서 기업 관련 최신 보고서, 정책 평가 보고서 같은 답변을 바로 내놓는 서비스 같은 다양한 기능들을 하나씩 더 붙일 예정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능들을 정교화하는 만드는 수학 알고리즘 및 각종 시스템 설계와 구현이 어렵지, 단순한 웹페이지가 개발 난이도가 높은 서비스는 아니다.

사업 초창기에는 이런 단순한 서비스조차도 고급 개발 언어를 써서 만들었다고 외부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평가에 휩쓸렸는데, 그렇게 만든다고 사용자 경험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프로그램 언어를 쓴 것에 지나지 않는만큼 개발자들이 색다른 언어 공부하는 시간을 더 주는 회사라는 평가 밖에 못 받겠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가 사업 초기부터 집중했어야 하는 것은 개발이 아니라 콘텐츠였다. 내 눈 높이를 충족시키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인력이 한국 땅에 거의 없다는 사실, 콘텐츠를 보여주는 웹서비스는 워드프레스 같은 단순 솔루션으로 만들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깨달았으면 아마 나는 ‘개발자만 안 뽑았더라면’이라는 글 자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사업가가 됐을 것이다. 한국에서 아예 직원을 뽑지 않았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이 이렇게 문해력, 기술력이 부족한 인력 위주로 구성된 나라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면, 모든 콘텐츠를 영어로 제작하면서 해외 시장에만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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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

지난 몇 년간 나의 좌절과 역경을 이해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춘 분들 중 해외에서 귀국을 타진하시던 많은 분들이 귀국을 심각하게 고민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말을 바꾸면, 나는 그 분들 대신 한국 시장을 실험해드렸고, 실험에 실패한만큼 지난 5년 이상의 시간을 한국 시장에 헛되이 낭비했던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이 드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진짜 늦었다는 평가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실패를 디딤돌로 삼아 다시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개안뽑’시리즈는 스스로의 실패를 거울 삼고 싶은 나 자신의 ‘오답노트’와도 같은 글이다. 누군가 한국에서 IT사업을, 아니 그 어떤 사업이건 한국인을 채용해서 사업 하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꼭 읽고 나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담아서 쓴 글이기도 하다.

매몰비용 같은 서비스라고 생각하고 한국어 콘텐츠를 완전히 다 버리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파비리서치OTT랭킹에 올라간 콘텐츠들의 구글 검색 순위가 단기간에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번역기와 번역SEO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포기를 논할 시점이 아니라, 그간 쌓아온 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를 고민해야겠다고 관점을 바꿨다. ‘개안뽑’을 쓰면서 그간의 경험 덕분에 한국의 기술직이 어떤 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게 됐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는데, 덕분에 향후 회사의 IT시스템을 어떻게 운영해야할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얻은 부분이다. 이어, 한국 시장에서 인력을 채용하는 것이 얼마나 도박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됐는데, 아마 나는 한국 시장의 고용 창출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될 것 같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혼자 찾아보고 공부해서라도 직접 하는 편이 남들 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더라. 이렇게 급여 받을 수준이 안 되는 인력들이 많은지 몰랐다면 정부의 각종 고용 지원 정책을 지지했을텐데, 이제는 세금이 너무 아까워 보일 뿐이다.

요즘 자동화 모듈들이 AI라는 이름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출시되는걸 보면서, 기사 작성처럼 매일 유사한 업무가 반복되는 영역은 시간을 좀 더 들여서라도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나 혼자서 20분 남짓을 쓰면 자동화 알고리즘이 작업한 것보다 훨씬 더 고급 콘텐츠가 나오니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지만, 인력을 써보면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10배를 투입해도 내 기대치의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인력들이 시장의 압도적 다수라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자동화 알고리즘의 가치를 인건비 대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 것도 그나마 얻게 된 지식이다.

여전히 조금 더 일찍 빠져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지만, 실패의 경험이 성공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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